호놀룰루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낮엔 사무실에서 일하느라 한국에서와 별 다를 바 없이 모니터 뷰만 즐길 수 있었지만, 야근이나 주말 근무가 없는 날엔 무조건 바다로 나갔다. 어려서부터 물에 한번 들어가면 입술이 파래지도록 나오지 않아 엄마한테 끌려 나오기 일쑤였을 만큼 물을 좋아했던지라, 나에게 하와이는 지상낙원이었다.
무작정 코스트코에서 싼 스펀지 보드를 하나 사서 쿠히오 비치로 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거실에서 보드를 깔고 일어나기 몇 번, 팔 젓기 몇 번 연습해 본 경험이 다였다. 이러니 파도타기는 고사하고 보드 위에 한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팔만 휘적이다 어찌어찌 해변으로 겨우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아, 이건 내가 원하던 그림이 아닌데... 내일은 반드시!!' 밤새 유튜브를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에 몰두했다.
다음날 갈비뼈 골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갈비뼈며, 어깨며, 목이며 안 아픈 데가 없었지만, 또 그 바다로 나갔고, 전날과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무한 팔 젓기... 이렇게 내 로망 중 하나가 "아주 멋없는 허우적거림" 속에서 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치열하게 팔만 젓고 있는 내가 안 돼 보였는지 바닷가 옆 자리에 있던 중년 부부가 자기를 따라 하라며 패들링(팔 젓기)부터 테이크오프(일어서기)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고는 내 보드를 발로 끌고 다른 서퍼들이 파도를 기다리며 모여있는 곳까지 데리고 나갔다. 일어서려다 바다에 빠지기를 몇 차례. 유튜브 이미지 트레이닝 덕분인지, 이 부부가 엄청난 서핑 스승이었든지, 아니면 내 운동신경이 급발전했든지, 난 드디어 첫 테이크오프에 성공했다. 내가 상상했던 멋진 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성공적으로 바람을 가르며 파도 위를 날아가는 기분을 맛봤다.
나같이 단순무식한 학생을 가르쳐 이 정도 경지에 오르게 해 준 부부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분을 이날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 쉬워 보이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다에 들어갔을 때 즐길 줄 아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열정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내가 바다에 맞출 수 있는지 파도가 또 나를 받아들여줄지를 알아야 서핑을 즐길 수 있어요. 오늘 파도 위에 선 그 느낌을 잘 기억하고 천천히 즐기세요. 느긋하게. 어제오늘 보고 아내랑 내기를 했죠. 저 사람은 분명 한국 사람일 거야. 빨리빨리.”
이 부부는 이틀 만에 나라는 사람을 간파해 낸 것이다. 어쩌면 모두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이 바다에서 죽자 살자 이를 악물고 무슨 상륙작전이라도 하는 양 허우적대는 내가 눈에 더 띄었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난 곧 60이 되는데, 우리가 어릴 때 원하던 파도와 지금 고르는 파도는 달라요. 그때보다 스릴은 덜 해도, 바람도 느끼고, 흐름도 배우고, 다른 서퍼들도 볼 수 있는 파도가 좋아요, 지금은. ”
서핑하면 도전, 젊음, 설렘 같은 이미지만 떠올렸던 나에게는 관점의 전환이었다. 도전이나 설렘, 무조건적인 끌림은 나 같은 서핑 초보, 인생 초보들이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기다림, 느긋함이야말로 서핑의 본질이 아닐까? 나한테 맞는 파도를 기다릴 줄 알고, 아무리 좋은 파도라도 양보할 줄 알고, 어리바리한 외국인 초보 서퍼에게 친절한 미소를 건넬 줄 아는 여유.
와이키키 해변의 석양이 우리 테이블까지 스며들어 와 중년 부부의 얼굴을 비춘다.
나도 이 부부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