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모레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나는 아직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본래 성격이 급하고 계획대로 안되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편인데, 특히 운전하거나 일할 때는 그 조급함이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운전대를 잡은 댕댕이가 되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느긋해지긴 한 것 같은데, 이건 내 마음 상태가 여유로워진 거라기보다는 나이를 먹으며 에너지가 달려서 할 수 없이 행동이 한 템포 느려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직도 깜빡이 없이 끼어드는 차를 보면 머릿속에 바로 육두문자가 떠오르며 입술이 달싹거려지지만 예전처럼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거나 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아. 저 사람이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보구나’ 하며 이해하는 경지에 오른 것은 전혀 아니고 그냥 즉각적인 반응을 포기하는 것에 가깝다.
나이를 먹으면 진정한 삶의 여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은 하나둘씩 포기하며 얻는 것이 여유인 듯하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내 그릇은 그렇게 크지 못하다. 뭔가를 비워야 겨우 틈이 나고 그 틈으로 숨을 쉬어야 딱딱하게 뭉쳤던 긴장이 풀리고 그제야 나를,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생긴다. 그러고 나선 또 그 비워낸 것이 아깝고, 겨우 낸 그 틈이 비어 보여 다시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는 노력을 무한반복하며, 나이 들면 저절로 여유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해왔던 것이 내 이삼십 대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빨리 나이 드는 것이 꿈이었다. 빨리 어른이 돼서 나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싶다는 의미의 “어른”이 아니라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계셨던 할머니가 나에게는 롤모델이었다.
꼬마였을 때 나는 동생과 싸우면 누나니까 네가 참으라는 엄마한테 대들다 야단맞기 일쑤였다. 그럴 때 할머니가 비비빅 하나 사주시며 나처럼 첫째였던 아빠 어릴 때 얘기를 해주시면 억울했던 마음은 어느새 풀려 동생 줄 과자도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왔었다. 어려서 “왜”를 입에 달고 살던 나에게는 “그냥 해” 내지는 “몰라”라는 대답이 아니라, 물어보면 재밌는 옛날 얘기 같은 답을 척척 해주는 할머니는 그야말로 내 장래희망이었다. ‘나도 빨리 나이 들어 우리 할머니처럼 돼야지’ 하던 어린 마음은, 회사를 다니면서 ‘빨리 나이 들어 정년퇴직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소(?) 변질되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나이 듦 = 경험 + 여유”이다.
주위에서 나이가 들수록 여유를 잃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포기했다 다시 채워 넣기를 반복하는 현실 속에서 나도 그렇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이제는 내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포기 때문에 생긴 여백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한다. 그 여백을 일종의 도피나 무력감이 아닌 그 자체로 꽉 찬 “여백의 미”로 느꼈으면 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안달복달하지 않고, 갑작스런 황당한 일이 생겨도 웃음과 위트로 넘길 수 있는, 마음이 여유 있는 할머니가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