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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Jan 01. 2024

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24.1.1  

하루 한 권 읽기 ---2024  필사 챌린지


2024. 1. 1

제목 연애소설 읽는 노인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 


P165 ∼ 마지막


 다시 시간이 흘렀다.

노인은 카누 바닥 틈새로 들어오는 빛의 세기를 보며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고. 네놈은 아직도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

 그러나 일은 노인의 생각과 달리 엉뚱한 쪽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암살쾡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카누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노인은 재빨리 카누에 바짝 다가앉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땅바닥을 긁는 소리가 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카누의 측면 쪽이었다.

 마침내 결투를 받아주지 않는 인간을 찾아 나섰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노인은 등으로 기어 짐승이 자갈밭을 파고 있는 측면의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맞은편으로 이제 막 짐승의 발톱이 드러나고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가까스로 개머리판을 가슴에 갖다 대자마자 그 자세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짐승의 발에서 튀는 피를 본 것과 동시에 자신의 오른발에서 전해 오는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짐승의 앞발을 향해 발사된 총탄이 빗나가면서 그중 한 발이 자신의 발등을 스쳤던 것이다.  

 이런, 비긴 거나 다름없잖아.

 카누로부터 짐승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서야 노인은 낫칼로 카누 바닥의 틈새를 긁어낸 뒤에 바깥을 내다보았다. 암살쾡이는 카누로부터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총에 맞은 부위를 핥고 있었다. 

 노인은 총을 재장전하고 단번에 카누를 뒤집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지독한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 바람에 상대가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한 짐승은 바닥에 몸을 바싹 갖다 붙였다.

 「뭣하고 있어. 덤비라고. 그래서 단번에 이 빌어먹을 게임을 끝장내야 할 게 아냐!」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악을 쓰며 – 그게 스페인어였는지, 아니면 수아라 족 언어였는지 자각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 나아갔다. 부상당한 짐승 역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고, 노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노인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거대한 화살처럼 강변을 달려오던 암살쾡이는 불과 네댓 걸음을 남긴 지점에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차분하게 그 순간을 기다리던 노인은 짐승의 도약이 정점에 이르자 방아쇠를 당겼다. 일순 허공에서 도약을 정지한 듯한 짐승은 이내 몸을 비틀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인은 짐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발의 총탄이 짐승의 가슴을 열어 놓은 것을 보며 치를 떨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몸집을 지닌 짐승의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인간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노인은 눈물과 빗물에 뒤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짐승의 시체를 끌고서 강가로 나갔다. 그는 그 짐승의 시체가 우기에 불어난 하천을 따라 다시는 백인들의 더러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거대한 아마존 강이 합류하는 저 깊은 곳으로 흘러가길 바라면서, 그리하여 영예롭지 못한 해충이나 짐승의 눈에 띄기 전에 갈기갈기 찢어지길 기원하면서 강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노인은 느닷없이 화가 난 사람처럼 손에 들고 있던 엽총을 강물에 던져 버렸고, 세상의 모든 창조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그 금속성의 짐승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르타토레, 유고슬라비아, 1987

                                                                                                                함부르크, 독일, 1988


***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의 군사정권하에서 반독재 반체제 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독일로 망명한 후 스페인에서 살고 있습니다. 1989년,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발표하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죠. 

「귀향」, 「지구 끝의 사람들」, 「파타고니아 특급열차」, 「감상적 킬러의 고백」, 『핫라인』 등 그의 소설을 더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백인도 원주민도 아닌 아마존에서 오래 산 백인을 화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잡는 데 성공합니다.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과 그에 맞서는 동물의 대결을 담담하게 그려냈습니다. 총앞에 자연은 희생당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노인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연애소설을 읽는거죠. 잠시 동안만이라도 인간의 잔혹성을 잊기 위해, 사랑이 아름답다고 추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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