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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Dec 25. 2023

괜찮아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

  “119입니다. 지금 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으니 빨리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아침 출근길, 사무실 근처까지 왔을 무렵이었다. 나는 급히 병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빠가 목욕하다가 쓰러지신 것을, 반찬을 갖다 주던 동사무소 사회복지사가 신고했다고 한다. 

 아빠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응급실에서도 중앙에 있는 중환자 구역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고 가슴이 크게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장면 같았다. 2년 전 동생의 마지막 모습, 그때 동생 임종에 갔을 때 저렇게 가슴이 움직였었는데. 


 아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일까? 하지만 전날까지 아빠는 혼자 밥도 해 드시고 괜찮았는데.

CT, MRI 등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응급실에서는 더는 할 것이 없다고 했다. 이미 많은 장기가 기력을 다해 혈압도 다른 수치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빠는 요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아버지가 훈장이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식들은 가르치지 않았어.”

충, 효를 믿는 유교주의자인 아빠도 아버지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빠의 오른손은 엄지가 한마디 없다. 할아버지가 소여 물을 먹이려 작두로 풀을 썰다가 일곱 살이던 아빠의 손가락이 잘렸다고 했다. 농사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 교육하지 않은 것이라고 아빠는 말했었지. 

 아빠는 충주시 산척면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 4남 1녀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이었으니 일제 강점기였고 신문물이 들어와 있었지만, 아버지였던 고지식한 훈장은 내면도 외모도 조선 시대 그대로였다. 머리를 길러 상투를 틀었고 도포를 입었으며 집에서는 기다란 담뱃대에 담배를 넣어 피웠다. 원래 할아버지 집안은 그렇게 산골에 살지는 않았었는데 단발령이 내리자 머리를 자르지 않으려 산골 깊숙이 들어갔다고 한다. 

 학자 집안이라고 했던가. 아빠는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모두 학자라며 자랑스러워했지만 결국 학자였던 할아버지가 아빠와 그 형제들을 교육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가난이 문제였을까? 시대를 읽지 못한 대가는 컸다. 아빠의 남자 형제는 모두 힘들게 살았고 막내딸은 스물두 살에 자살했다. 고모 또한 집안일만 하다가 열여덟 살에 도망쳐 서울로 왔다. 공장에 다니다가 버스 안내양이 되었다. 우리 집에 올 때 꼭 우리 5남매의 숫자만큼의 과자봉지를 사 왔었지. 왜 자살했는지는 모른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소식이 전해졌을 뿐.

 배운 것도 없이 일곱 식구를 부양해야 했기에 아빠는 일용직 노동자로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하지만 아빠의 내면은 조선 시대 선비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을 하늘같이 떠받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아내와, 여자라서 초등학교도 안 보내고 일을 시키고 싶었는데 끝내 공부하겠다는 딸들과, 애지중지 독자만큼은 공부를 시키려 했는데 게임만 하는 아들이 모두 늘 못마땅했다. 우리 네 자매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우리에게 엄마가 있어서였다.


 고등학교 이후 나는, 나에게 아빠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서삼경이니, 뭐니 이상한 말만 해대고, 엄마와 우리에게 폭력까지 휘두르는 사람은 아빠일 수 없다고 맘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빠는 없다고, 그렇지만 나에게 엄마는 있다고, 그래서 나는 절대 고아는 아니라고, 보육원에서 자라는 많은 아이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엄마는 능력 이상으로 우리를 부양해 왔다고, 오랜 세월 나 자신을 그렇게 위로해 왔다. 

그러나 이제 가끔 나는 내 안에 아빠의 유전자를 느낀다. 아빠의 고집스러운 성품을 나도 닮았을까? 


 세월은 선생이라고 했던가. 

나이를 먹어가며, 세월이 흘러가며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아빠도 변해갔다. 대학교 4학년 때 아빠가 처음으로 만 원을 주었다. 내 생일 선물이라며.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아빠였으니까.

 그 후 4 자매가 결혼해서 분가하고 손자들이 커가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막내 남동생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아빠는 점점 왜소해져 갔다.

 그래도, 그렇게 말랐어도, 머리가 하얗게 셌어도 아빠의 마음만은 꿋꿋했었다. 아빠에겐 마지막 보루가 있었으니까. 아빠는 자기에게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 씨 족보를 만들라는 사명. 벌써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니까 거의 40년 전부터 틈틈이 족보를 써왔다.

 생전에 엄마가 그렇게 싸웠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었지. 쓰러지기 몇 분 전까지도 족보를 보고 있었던 듯 아빠의 책상은 쓰다 만 한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요양병원에서도 아빠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의식이 돌아올까 무서웠다. 아빠에게 자신이 이제 족보를 완성하지 못할 거란 걸 알게 된다는 것, 그것보다 더한 절망이 과연 있을까?

 요양병원으로 간 지 2주가 되었을 때였다. 새벽 4시에 전화가 왔다. 4시 반에 병실에 들어갔다. 아빠는 황달이 와서 온통 노래져 있고 그 깡마른 몸도 통통 부어있었다. 가슴이 움직이고 있어서 살아계시나 했지만, 옆의 기계의 붉은 선은 조용히 긴 일자를 긋고 있었다. 돌아가신 지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인공호흡기는 호흡을 공급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장례식 도중에 잠깐 족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우리 자매들은 물론이고 아빠 형제들도 안 가져간다고 했다. 그렇겠지. 결국 40년의 세월이 담긴 아빠의 미완성 족보는 폐지가 되어버렸다. 

 아빠의 유골함은 납골당에 이미 있던 엄마의 유골함 옆에 놓였다. 부부 합장한 후, 모두 기도하느라 눈을 감았다. 


아빠는 울고 있다. 족보를 끝내지 못해 그런 것일까?

 “괜찮아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다가가서 아빠를 안았다. 나에게도 아빠가 있었던가. 

괜찮아요. 족보보다 아빠가 더 중요해요. 아빠. 이제 편히 쉬세요.

일평생 고생만 했던 아빠가 이제라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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