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니단로 여행자들>의 최유진 작가를 만나다.
모처럼 새 사람을 만날 기회였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공지에 나는 미간을 짚고 누구를 만날지 고심했다. 좋은 만남을 가지고 싶었다. 추후 연락을 지속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하는 그 날의 두어 시간만큼은 즐겁길 바랐다.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나 잘 나가요’하는 겉치레 대화나 사생활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럴 때는 취향을 공유하면 딱 좋다. 각자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를 천천히 풀어놓다 보면 두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간다.
그래서 최유진 에디터를 선택했다. ‘선택’은 조금 무례한 단어일 수 있으나 나는 마음이 크게 끌리는 그의 취향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유진 에디터는 포스트락 음악을 좋아하고, 아프로펌 헤어스타일도 해본 적이 있다. 이태원에서 일하는 동안 회의감을 느꼈고, 최근에는 펀딩으로 책을 출간했다. 난 ‘포스트락’이나 ‘아프로펌’이 뭔지 몰랐다. 내게 이태원은 놀러 가는 동네에 불과했고, 갓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책 출간은 아주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의 삶이 한 뼘 정도 생소했지만, 왠지 우리의 취향이 비슷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둘 다 산책을 좋아하고,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비추는 이야기를 하고, 특이한 헤어스타일에도 도전해보았기 때문이다.
‘저도 과감한 머리를 해본 적이 있어요’라는 수작으로 만남을 청했다. 고맙게도 유진 에디터는 나의 티 나는 수작질에 웃으며 응해주었다. 나의 글을 읽고 좋아하는 것들이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같은 플랫폼에 글을 쓰는 동안 우리가 서로를 몰래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만남의 장소는 망원이 어떻냐고 물었다. 망원동은 알차고 복작복작한 시장과 자그마한 가게가 어우러진 조용한 동네이다. 유진 에디터는 망원에 가본지 좀 되었다며 장소를 마음에 들어했다. 어렵지 않게 장소와 날짜를 확정했다. 시작이 좋았다.
우리가 만난 건 2월의 첫째 날이었다. 연휴에는 어떤 가게가 문을 열지 몰라 사람을 만나기에 아주 까다롭다. 곤란한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아 유진 에디터 몰래 C안까지 계획을 짰다.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고도 아닌 척하는 건 내 고질병이다.
아무튼 이런 계획 덕에 우리는 맛있는 커피와 테린느를 먹었다. 카페에 가는 길에 비건 식당이 있길래 쿨하게 밥도 먹었다. 눈이 마주치고 첫인사를 하자마자 즐거운 만남이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일단 커피를 마시고 성향이 영 안 맞으면 물러설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밥도 먹고 산책도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화는 흥미로웠고, 우리 주위를 잔잔히 지나가는 모든 배경이 행복했다. 유진 에디터에 대한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면 이렇다.
1. 최근 <화니단로 여행자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텀블벅에서 펀딩을 받아 책을 출간했다. 호기심에 질문을 했는데, ‘화니단로’는 실존하는 곳이 아니었다. 김포공항 옆에 있다는 등 서술이 굉장히 자세해서 동네의 냄새까지 느껴질 정도였는데, 허구의 장소라고 한다. 소설 작가의 대단함을 다시금 실감했다.
2. 매우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
산악부를 했었다는 말은 정말 의외였다. 운동하는 사람들을 대체로 신기해하는 나는 그만 그 정보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창작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에 도전했다는 사실이 멋졌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3. 트렌드와 현실에 관심이 많다.
유진 에디터의 글 몇 개와 <화니단로 여행자들>을 읽고 그가 일반적인 세상의 흐름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유진 에디터가 최근 기고한 ‘돌고래유괴단’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트렌드와 일반 대중의 시선에도 꽤 관심이 많은 편이다. “소설을 진지하게 쓰는 사람들은 모두 공상가일 거야.”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나의 편견은 유진 에디터와의 대화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자립심이 강하고 독특한 세계를 가진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이고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4. 청량리행은 좀 곤란하다.
우리가 각자 재학 중인 두 학교는 매우 인접해있다. 대화 중에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놀라며 학교 주변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겠다며 웃었다. 오로지 글만 보고 만난 사이인데 이만큼 인연이 깊다는 게 신기했다. 앞으로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연이 깊은 거라고 우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날의 유진 에디터는 잘 웃었고, 귀여운 옷을 입었고, 무거운 가방을 들었다. 그가 자신의 세계를 거리낌 없이 소개해주는 동안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동안 완전히 생소한 유진 에디터의 세상을 만나며 많은 걸 배웠다. 특히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은 당장 내 삶에 반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이후로 내 평균 기상 시간은 2시간 정도 당겨졌다.)
간만의 새 사람 만나기 프로젝트는 이렇게 성공적이었다. 일시적인 만남에 그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제법 많은 걸 공유했다. 추상적인 취향부터, 알파벳과 문장부호로 이루어진 인스타그램 아이디까지. ‘우리 취향이 비슷할 것 같아요’라는 부끄러운 제안은 기분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서둘러 따뜻한 계절을 준비해야겠다. 새로운 공기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새로운 취향을 두르고 유진 에디터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 계절의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한 채로 인사를 하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