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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과 Jul 08. 2022

언더스터디의 마음가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언더스터디이다


*연극 내용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극 ‘언더스터디’는 한 연극의 언더스터디 리허설 장면을 보여주는 극이다. 배우들이 준비하는 연극은 ‘The Castle of Trial’이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미공개 작품이다. 포토존과 티켓에도 그 영어 제목이 함께 적혀있다.


카프카의 작품이라니, 극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 속에서 듣게 될 수많은 철학적 물음들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연극을 본 후의 감상은 예상보다 간단했다. 과연 누가 언더스터디인가.




해리


해리는 제이크의 언더스터디이다. 작품의 주인공 격인 브루스가 하차하지 않는다면 무대에 서지도 못하는 신세이다. 연극에 임하는 해리의 태도는 상당히 이중적이다. 카프카의 작품 해석에 큰 신념을 가진 배우로서 제이크의 해석을 비판하다가도, 돈 때문에 언더스터디로 참여했다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기도 한다.


해리는 제이크에게 부정적인 첫인상을 남긴다. 리허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록산느의 권한에 도전하고, 제이크의 관점을 부정하며 까딱 연극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리가 연기를 시작하며 제이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 난해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지하게 임하는 해리의 모습과 연기 실력에 감탄한다.


사회인으로서 해리는 미숙하기 짝이 없다. 시스템을 인정하지 못하고 권한을 가진 이에게 도전한다. 그런 모습이 해리의 깊이 있는 배우로서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리는 자부심이 강한 배우이다. 제이크나 브루스처럼 상업 영화의 수익성을 추구하지 않는 척 군다. 실상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배우일 뿐인 해리는 제이크를 조롱하고 결과를 인정하지 못한다.


언더스터디란, 준비된 배우가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경우 대신 무대에 올라가도록 준비된 배우를 의미한다. 기존의 배우가 하던 역할을 그대로 흡수해 위기상황이 없는 양 관객들에게 공연을 선보이는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해리는 기존의 무대 진행을 못마땅해하며 작품을 재해석한다. 해리의 해석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는 좋은 언더스터디라고 하기 어렵다. 제작자의 관점에서 그는 피곤한 상황만 불러일으킬 뿐 문제 상황에 부르고 싶지는 않은 배우로 여겨진다.   



제이크


제이크는 현재 브루스와 함께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이다. 동시에 브루스 역할의 언더스터디이기도 하다. 최근 출연한 영화가 상당히 흥행하며 작품 초반에는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인다.


제이크는 브루스의 역할을 원하는 동시에 해리가 자신의 역할을 맡는 건 꺼린다. 그러나 이내 제이크는 해리가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자 감탄하며 그에게 마음을 연다.


돈이 될 만한 영화를 원하는 듯했던 제이크는 사실 해리만큼이나 연기를 사랑한다. 카프카의 작품을 고심해서 분석하고 무대 위에 펼쳐낸다. 록산느가 제안하는 극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도 관심을 보인다. 끝까지 해리에게 연기를 전수해주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극에 대한 열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제이크는 성공한 영화를 찍은 후로 자신이 원하는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한 영화의 출연을 고대하며 누군가와의 통화를 반복한다. 그러나 원하던 배역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연쇄 작용으로 제이크가 들은 소식은 모든 이의 비극이 된다. 




록산느


록산느는 연극의 무대 감독이다. 록산느의 수많은 대사 중 그가 바비를 연신 불러대는 장면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바비는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무대 장치와 조명을 통제하는 스태프이다. 제정신이 아닌 건지 바비는 록산느의 지시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다.


록산느는 바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가 또 그를 달래기를 반복한다. 답답한 마음에 이따금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록산느는 본래 배우를 꿈꾸던 인물이다. 그러나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한정적이었고, 그는 결국 무대 감독으로서 연극에 참여하게 되었다. 해리나 제이크 같은 배우였다면 바비 따위의 인물과 실랑이를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록산느는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다.


해리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록산느가 제이크에게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는 장면이 있다. 취조실 장면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충분히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다며 시범을 보인다. 제이크는 ‘브루스는 이 장면에서 항상 소리를 지른다’라며 록산느의 연기에 감탄한다.


록산느는 준비된 배우이다. 모든 대사와 장면을 외우고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분석하기도 한다. 아무도 그녀에게 무대 감독 이상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록산느는 열정 하나로 배우이기를 자처한다. 당장이라도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그의 모습은 자발적인 언더스터디처럼 보인다.   



브루스


브루스는 할리우드의 톱스타 배우이다. 관객은 해리와 제이크, 록산느의 대사를 통해서만 브루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브루스는 이미 막대한 재산과 유명세가 있다. 본인이 원하는 작품을 쉽게 선택해 출연할 수 있는 입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브루스의 움직임은 세 명의 등장인물에 큰 영향을 미친다. 브루스가 연극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경우 제이크는 브루스의 역할을, 해리는 제이크의 역할을 맡게 된다. 록산느의 통화 내용에서 브루스의 하차를 짐작한 제이크와 해리가 신이 난 이유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예상과 달리, 브루스의 하차로 연극의 종료가 결정된다. 사람들이 더 이상 톱스타가 없는 연극을 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예상 때문이다.


브루스가 급작스레 출연을 결정한 작품은 제이크가 그토록 원했던 작품이자 역할이다. 제이크는 브루스가 역할에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그 역할을 간절히 원하는 걸 보고 빼앗아간 것이라며 분노한다.


브루스는 여전히 제이크보다 성공한 배우이다. 하지만 제이크가 출연한 영화가 흥행하며 질투를 감추지 못하고 그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현재는 제이크가 브루스의 언더스터디이지만, 브루스의 행보는 오히려 그가 제이크의 언더스터디가 아닌가 싶은 의문을 들게 한다.



결국은 모든 등장인물이 언더스터디로 보인다. 모두 원하는 자리가 공석이 되는 순간과 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언제든 대타가 되기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기회가 올 가능성이 매우 적어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건 언더스터디라는 직책이 아니라 자세다.


작품의 언더스터디인 해리는 정작 언더스터디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 동료 배우와 무대 감독을 피곤하게 할 뿐이었다. 제이크는 누군가의 언더스터디이자 자리를 넘겨주게 될 두 가지 위치에서 큰 책임감으로 리허설에 임한다.


록산느에게 주어진 언더스터디의 역할은 없었으나,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배역을 준비한다. 노력하는 그에게 적당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배우의 삶을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다. 브루스는 그 누구의 언더스터디도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에 애정을 가지지 못하고 다른 이의 행보를 훔쳐보기에 급급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언더스터디이다. 어떤 언더스터디가 될지는 자신이 정할 수 있다. 연극 ‘언더스터디’에서 권한과 관점, 그리고 선택을 둘러싼 더 많은 이야기를 직접 경험해보길 바란다.


2022년 2월 27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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