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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과 Jul 08. 2022

그 여자의 기억법

이 글은 과잉기억증후군과 정반대의 기억법을 가진 나의 이야기이다.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은 과잉기억증후군을 겪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과잉기억증후군은 365일 8,760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을 모조리 기억하는 일종의 기억장애이다. 주인공은 과거에 겪은 불운한 사건을 방금 일어난 일처럼 속속들이 기억한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 있다. 망각과 용서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남자는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아간다.


인간 뇌의 망각 기능은 분명 행운이다. 그렇다면, 어느 수준의 망각을 ‘선물’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걸까. 이 글은 과잉기억증후군과 정반대의 기억법을 가진 나의 이야기이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출처 : 김승현 인스타그램 @archive_zhenxi


나는 과장을 좀 보태자면 기록 없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추측이지만) 특별한 병이 있는 건 아니다. 삶을 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공부도 나름 잘하는 편이고, 얼굴도 잘 기억한다. 다만, 공부는 암기 과목보다는 이해 과목을 훨씬 잘했고, 얼굴은 금방 알아보지만 이름을 잘 못 떠올릴 때가 많다.


세부적인 정보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특히 내 문제 외의 타인의 정보에는 정말 둔감해 사적 정보를 놀라울 만큼 기억하지 못한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S는 내 대학 생활 전부를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이다. 어느 날 S를 만났는데, 예쁜 은색 목걸이를 했기에 새로 샀냐고 물어봤었다. S는 황당한 얼굴로 답했다. “이거 너 입학할 때부터 하고 다니던 거야!” 3년 동안 애착 목걸이 수준으로 하고 다녔던 걸 뜬금없이 새로 샀냐고 물은 것이다. 심지어 같은 목걸이를 두고 두 번이나 이 대화를 반복했다.


비슷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J와 나는 취미 생활을 하다가 만난 사이이다. 문득 어떤 대화를 하다가 J가 자신이 인천의 한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말했다. 인천에 사는 나는 그가 인천에 어떤 연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 ‘오~’라고 분명히 답했다.


몇 달 후, 그 지역에서 중학교 친구를 만났다. 약속을 마치고 그날 밤 J에게 내가 갔던 식당과 카페, 그리고 돌아다닌 길을 말해주었다. J는 그 공간들을 모두 안다고 대답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거기를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었다. 이전의 대화를 아예 잊은 것이다. “나 거기서 대학 나왔다고 말했잖아요.” J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리고 역시나, J와도 같은 대화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어지간한 문제는 그러려니 하는 J가 서운함을 표할 정도였다.


사실 나와 친하다면 다들 이런 일을 몇 차례 겪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냐고 의심할 법도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을 비롯한 내 친구들을 모두 정말 사랑한다. 변명하자면, 사는 장소나 입었던 옷 등의 정보는 일상적인 소통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나도 모르게 그런 정보를 머금지 않고 흘려보낸다. 물론 기억할 정보를 의식적으로 선별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잊곤 한다.


대신 사생활 밖 범위의 재미있는 대화를 한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사생활에도 관심이 없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면,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묻지 않는다. 그런 정보를 전혀 몰라도 할 수 있는 대화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서로 만나게 된 계기나 취미, 좋아하는 일에 대해 말하면 세 시간 정도는 뚝딱 흐른다. 시시콜콜한 사생활보다 현재의 생활이나 관심사에 충실하게 몰입하는 대화가 더 좋다.   



잠깐 메모 좀 할게


출처 : 김희진 인스타그램 @heejin.ing


그래도 가끔은 기억해두면 좋은 정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생일을 미리 알아두면 맞춤형 선물을 준비할 수 있다. 친구가 앞둔 중요한 시험 날짜도 알아두었다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나의 뇌는 그런 정보를 곧잘 뱉어낸다. 그래서 나는 전화번호부의 기타 메모란과 캘린더를 애용한다.


내 기록하는 습관은 사실 집착에 가깝다. 아주 멋지고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며칠만 지나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게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스무 살 이후로는 매일 일기를 쓰고, 사진을 잔뜩 찍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만난 모든 걸 사진으로 저장하고 잠들기 전 앨범을 살피며 일기를 쓴다.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의 감정이 피어오른다. 그 느낌을 잊기 전에 최대한 다채로운 언어를 골라 일기에 적어둔다.


문득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잠깐만, 뭐라고?’라며 핸드폰을 집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이 말을 반복하게 만들어 정말 민망하고 미안하다. 하지만 내 다정한 친구들은 항상 그 모습에 웃으며 말을 찬찬히 되짚어준다. 꼭 잘 기억하라며 어깃장을 놓기도 한다.


이 공간을 빌려 특별히 그 친구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내고 싶다.



너도 멸종되지 않게 조심해


출처 : 김희진 인스타그램 @heejin.ing


호기심이 많은 나는 취미와 관심사가 다양하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쌓였다. 상대방에 따라 적절한 이야기보따리를 꺼내서 즐겁게 풀곤 한다. 말했다시피, 개인의 선호에 집중한 대화를 하다 보면 굳이 사생활을 캐낼 필요가 없다.


나는 개인 정보를 궁금해하지도, 잘 기억하지도 않는 대신 상대방이 선호하는 대화 방식과 주제를 금방 파악한다. 그리고 무례를 범할 가능성이 큰 대화 주제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룬다. 가정사나 형편, 종교 등 각자 나름의 세계가 존재하는 주제는 내 얘기조차 잘 꺼내지 않는다. 나의 상황이 타인의 비교 군이 되는 게 싫을뿐더러 나의 사소한 말이 타인의 세계를 과하게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례하지 않은 대화 상대가 되려면 똑똑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페미니즘이나 퀴어, 소수 문화, 환경 문제 등은 주류 사회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배워가기 어려운 범위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도태되지 않도록 꾸준히 공부한다. 주로 책과 다큐멘터리를 참고하는데, 배워갈수록 종종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상대를 불쾌하게 했을 무지했던 과거의 내 발언이 떠오를 때마다 그렇다. 그래서 여전히 주관이 잘 서지 않거나 확실하지 않은 지점에서는 말을 아끼기도 한다.


살다 보면 이런 사회 주제에 전혀 몰입해 본 적이 없는 티가 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한 지인이 자신이 애인을 가스라이팅 한 연대기를 말해준 적이 있다. 자신이 꾸준히 가르쳐 애인의 행동을 올바르게 ‘교정’했다며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진짜 그렇게 말했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고 그저 대화 내내 뿌듯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저 한심했다. 자신만의 잘난 세상에 갇힌 그는 가스라이팅 문제에 완전히 무지했다.


자신의 세계를 완전무결한 기준점으로 삼거나, 상대방의 세계가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건 아주 위험하다. 한 사람마다 가늠할 수 없는 완벽히 독창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래서 난 늘 공부하고, 조심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 사적인 범위 밖에서 서서히 친근감을 형성하고, 안으로 좁혀와도 늦지 않다.


썩 좋지 않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런 방식으로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글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기억력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살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어떤 대화를 하며 심각한 수준임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모르고 살아왔는지 나도 신기하다. 그 이유를 천천히 생각해 보니 나의 기록과 성찰, 배려의 습관 덕이었다. 이 글을 쓰며 특별히 모나지 않은 사회인으로 자라난 내가 대견해졌다.


오늘은 기억력이라는 주제 하나로 나의 생활과 인간관계의 특정 면모를 소개해 보았다. 다음에는 나에 대한 또 어떤 이야깃거리를 풀어놓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지만,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오늘의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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