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둑질은 언젠가 물물교환이 될 테니 말이다.
작가는 작가를 만난다. 삶의 일부를 끊임없이 글로 옮겨야 하는 작가의 운명 탓이다. 자신의 삶을 떼어 글을 쓰다가 떼어낼 말조차 메마를 때가 있다. 이때 고개를 들면 다른 작가와 눈이 마주친다. 서로에게서 매력적인 이야기를 찾고 탐낸다. 이 삶의 한 구석을 살짝 훔쳐다 글을 써도 될지 눈치를 본다.
다행히 동료 작가들은 다소 관용적이다. 필요한 게 같아서일지도 모른다. 당신도 지금 새 이야기가 필요한가요? 저돈데. 미동 없는 악수를 하고 고개나 한 번 끄덕이면 도둑질은 시작이다. 나의 이야기를 가져가든, 내가 이야기를 가져오든 상관은 없다. 시작이 어느 쪽이든 이 도둑질은 언젠가 물물교환이 될 테니 말이다.
살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작가’이다. 그건 내가 이미 살을 자주 훔쳐 글을 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살은 이미 책 한 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살을 동경하고 있던 마음이 더 커질 자리도 없는데 살은 그 이후로도 매력적인 작가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꾸준히 글을 썼다는 의미이다. 살이 만들었던 연극을 잊지 못한다. 그건 살의 말로 그야말로 가득 차 있었고, 난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감각을 살렸다.
연극이 끝난 후에도 계속... 살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간 뒤에도 살과 그의 연극을 상기하며 글을 쓰고, 살은 또 나의 소감에 소감을 남겨주고... 그러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작가’인 살은, 나를 계속 작가로 만든다.
현은 꼭 극작가처럼 응집된 말을 한다. 연극을 써본 적도 없는 애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묘하다. 사랑조차 돌려 말할 줄 모르는 나는 현의 말을 자주 멍하니 곱씹는다. 처음 받은 대본집을 리딩하는 배우처럼 한 문장을 족히 서너 번 읽고 읊조린다. 현의 의도를 그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나의 해석이 다분히 들어간 건지 모르는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책 한 권의 공동 저자처럼 신중하고도 솔직하게 대화한다. 우리의 주된 대화 소재는 ‘책상 앞에서 하는 일’인데, 바깥에서 겪은 일도 전부 책상 앞에서 정리되기에 결국은 삶의 모든 부분을 공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따금 찾아오는 행복의 순간을 기록하는 게 대화의 핵심이다. 이 기분을 어떻게 기록해서 보여줄 수 있을까? 현을 생각하면 행복을 더 잘 정리하게 된다.
임팩트 있는 대화를 어디에든 저장하는 버릇이 있다. 흘러가는 메신저 창을 정지된 이미지로 붙잡아 두어야 안심이 된다. 그래서 나의 ‘스크린샷’ 앨범에는 초록색이 가득하다. 첫째는 현의 이름 옆에 초록색 이모지를 두 개나 붙여두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발췌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 모든 부분을 저장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대화는 언젠가 발간될 나의 소설에 직접적으로 녹을지도 모르고, 사랑이 부족한 날 마음에 녹여 간접적으로 사용해버릴지도 모른다. 현은 화면 너머에서도 나를 가득 채운다.
응은 이상한 작가 지망생이다. 응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다 알면서도 동화를 쓰겠다고 한다. 비판하지만 비관하지 않는 응을 보면 가끔 머리가 띵해진다. 응과 달리 비관적인 나는, 내가 본 세계가 응보다 작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단단한 문장을 말하는 응을 보면 그 믿음을 꼭 쥐고 있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쓰는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 응을 찾는다. 응은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의 사과나무를 심을 사람이고, 단단한 사과 같은 말을 하며 그 씨앗을 건네준다. 응은 내 고통과 사랑의 이야기 그 어디에서든 교훈을 찾아주고, 그럼 다 괜찮게 느껴진다. 그래도 사랑은 결코 메마르지 않을 테고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갈 거야. 응 덕에 나는 이야기의 물물교환에서 ‘사랑’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작가’ 살은 지난달까지 매주 편지를 했다. 여럿에게 동시에 발송되는 공적이고도 사적인 그 편지에 나는 늘 사적인 답장을 했다. 거의 드러내지 않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적었다. 살이 내 이야기를 과식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을 했는데 살이 몰래 내 답장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 역시 살의 편지들을 몰래 모아두고 있었으니 쌤쌤이다.)
살은 이 편지와 답장을 모아 책을 낸다며 두 가지 부탁을 했다. 나의 답장 몇 개를 책에 담는 것과 뒷표지에 들어갈 추천사였다. 추천사라니. 추천사는 멋진 사람이 쓴다는 명제를 가지고 있던 나는 몸둘 바를 모르고... 곧장 수락했다. 그 연락을 받고 내내 마음이 간지러웠다. 나를 작가로 만드는 이가 부탁한 문장이 들어갈 자리에서 나 역시 작가답고 싶었다. 잘 채워온 보따리에서 제일 소중한 한 줌을 골라 살에게 건넸다. 하지만 사실 그건 살에게서 꼬박꼬박 훔쳐왔던 감각을 다시 돌려준 일일 테다.
작가는 작가를 만나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글의 인연을 말한 이 짧은 글 속의 내가 당신의 글에 어떤 식으로든 녹아든다면, 이 이야기 교환식 역시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