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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과 Mar 12. 2023

모든 걸 빼앗기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이 현실적인 스릴러를 보고도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난 가을, 친구의 블로그에 이상한 글이 올라왔다. 우울하다는 가벼운 투의 말과 'ㅋㅋㅋㅋ' 하는 웃음이 잔뜩 이어졌는데, 그게 평소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무슨 일 있나보네. 이따 카톡이나 해봐야겠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몇 시간 후 인스타그램을 켜고서야 친구의 블로그가 해킹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인 줄 알았어' 했더니 친구는 '내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냐'며 황당해 했다.


한 사람이 여러 계정을 만드는 시대다. 우리는 각 계정에 정체성을 나누어두고, 다른 사람의 각 계정도 다른 성격과 용도로 평가한다. 친구의 블로그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그런 게시글이 올라왔다면 의심했을 텐데, 사적인 감정을 쏟아두는 블로그라 충분히 그런 말을 적어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킹범은 블로그 주인과 전혀 닮지도 않은 말투로도 그의 공간을 의심 당하지 않고 점령한 것이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주인공 나미(천우희)는 ‘키르케’라는 닉네임의 비밀 계정을 운영한다. 요리 레시피를 소개하는 이 익명 계정의 주인이 나미라는 걸 아는 건 그의 친구 단 한 명뿐이다. 적어도 나미가 핸드폰을 분실한 사건까지는 그랬다. 

핸드폰수리점의 준영은 액정을 교체하는 척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이후 원격 조정으로 키르케 계정에 게시글을 올리는데, 회사를 욕하는 게시글을 본 직원들은 모두 나미에게 등을 돌린다. 나미를 신뢰하던 사장조차도 단칼에 나미를 잘라낸다. 나미는 덜덜 떨며 '해킹 당한 것 같다'며 호소했지만, 직원들은 나미의 말을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게시글의 내용이 본심이라 여긴다.


분리된 계정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어색하지 않다. 당장 지인들만 보아도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계정과 친한 이들에게만 공개하는 계정 정도는 나누어 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친한 친구'를 일부 설정해두고 사진을 올리는 기능도 있다. 모든 게 공개되는 사회일수록 제한된 나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욕심이 늘어간다. SNS가 성행하기 전까지는 '느낌'으로만 알 수 있던 범위를 이제 '계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의 특징적인 정체성이 중요해진 시대에 SNS에 계정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피드만 보아도 '이런 사람이구나' 싶은 계정은 단연 눈길을 끈다. 특징이 또렷한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계정의 색이 분명해질수록 할 수 있는 말은 점점 제한된다. 늘 화려하고 긍정적인 면모만 보여주던 이는 쉽사리 우울하다는 말을 뱉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면모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주 작은 사회 속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정에 올릴 말이 '평소의 나' 같은지를 고민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계정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각 계정의 정체성이 혼재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게 전부 '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형사인 지만의 아들은 수년 전 집을 나갔다.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며 살고 싶지 않다는 연락이 마지막이었다. 아들 준영은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 지만과는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지만 어머니와는 비밀스레 연락을 주고받았다. 자두 보내줄까, 하는 일상적인 문자 메시지들이었다. 지만은 부인의 핸드폰을 훔쳐보고 두 사람의 연락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준영이 현재 조사 중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결론적으로 준영은 범인이 아니었다. 극 내내 ‘준영’으로 불리던 이는 사실 진짜 준영이 아니었으며, 준영을 죽이고 그의 신분을 도용해 살던 연쇄살인마였다. 지만을 마주한 가짜 준영(임시완)은 피를 흘리며 '아빠 나 아파'라며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지만은 휘두르던 주먹을 멈추고 망설인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준영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을 만한 말을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그건 당연히 연기였고, 지만이 가정폭력범이었다는 건 준영의 스마트폰에 담긴 정보였다. 진짜 준영은 오래 전에 죽고 없었다.



타인의 정체성을 그럴싸하게 따라 하기가 너무 쉬워졌다. 나는 꽤 가까운 친구의 블로그 게시글을 보고도 그가 아닐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경계하더라도 제대로 분간해낼 자신이 없다. 누군가가 나를 흉내 내려 해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는 공포가 생긴다. 나의 수많은 말들은 공개 혹은 비공개의 상태로 인터넷을 떠돌고, 방치해둔 여러 계정 중 언제 어떤 곳에 타인이 나의 말투로 글을 올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온갖 도용의 공포는 커져만 간다. 타인의 브런치 글을 그대로 베껴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이 발생하고, 개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마저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속출한다. 얼굴을 입히는 딥페이크 기술은 물론이고 목소리를 추출해 하지 않은 말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보급화 되며 그야말로 인터넷에 있는 모든 정체성을 복사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 현실적인 스릴러를 보고도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미 영화를 켜는 순간부터 친구에게 영화를 볼 거라며 카톡을 남겼고, 중간중간 숨 쉬듯 트위터에 감상을 남겼으며, 영화가 끝나자마자 왓챠피디아를 켜서 별점을 남겼다. 우리는 인터넷이 우리의 목덜미를 쉽게 조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속에 갇혀 산다. 새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고민도 없이 새 계정을 만들고, 정체성을 쪼개고 쪼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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