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있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자발적 글쓰기는 소홀해지기 십상이다. 능력과 열정, 재능을 모두 갖춘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마감이 있는 글들은 그 수가 여럿이더라도 모두 해낼 수가 있는데, 마감이 없는 글들은 자꾸만 뒤로 밀리고 밀려 마감을 친 이후에야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는 지금 한동안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지 않은 이유를 주절주절 꺼내놓고 있다. 언제 또 훌쩍 떠날지 모르면서도 그럼에도 돌아왔노라고 조잘조잘 입을, 아니 손을 놀리고 있다.
그렇다 하여 그동안 브런치스토리라는 공간을 찾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글을 쓸 때보다 더 자주 들어왔다. 지하철에서조차 새 소설을 퇴고하던 나는 일을 하다 중간중간, TV를 보다 중간중간,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찔끔찔끔 브런치스토리를 찾았다. 어쩌면 인스타그램보다 더 자주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끔 고개를 들이밀고 팔로잉하는 작가님들의 새 글들을, 취향저격이라며 올라온 글들을, 접속한 시간에 새로 올라온 최신 글들을 읽었다. 여기에서 브런치스토리에 올라온 글들을 대하는 내 자세가 완연히 드러난다.
책을 읽거나 조사한 자료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브런치스토리에 올라온 글들은 이상하리만치 속독을 하듯 빠르게 훑어내려 간다. 가끔씩은 인터넷 기사를 읽을 때보다도 빠르게 완독 한다. 글을 쓰는 작가님들께서는 분명 굉장한 정성과 노력을 들여 한 땀 한 땀 이어 붙이셨을 텐데, 그 과정을 훤히 알면서도 꼭꼭 씹어 읽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럴까. 내게 브런치스토리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요 며칠 가장 큰 고민은 새 소설에 대한 글감을 찾는 일이었다. 사실 올해 남은 세 달은 그저 읽고 비워내면서 쉬려 했었다. 내년에는 작년, 올해 내내 끼적이던 소설을 꼭 제대로 집필해야지,라고 결심한 이후엔 더 그랬다. 비워내야 다시 채워지는 만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그저 쉬고 싶었는데, 좋아하는 작가님께 몇몇 프로젝트들의 링크를 건네주신 이후 마음이 바뀌었다.
쉬면 뭐 해! 재미있어서 쓰는 건데 계속 써야지!
그 때문일까. 물 흐르듯 글이 써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이전 소설들의 거대한 잔재들이 머릿속 곳곳에 남아 사유가 달려가는 길목들을 거대한 암석처럼 막아서고 있기 때문일 테다.
막힘없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잘 쓸 수 있는, 무엇보다 흥미가 있는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써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노트북 앞에 앉으니 생각만큼 글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의 흥미와 취향이란 다소 일관성을 띄기 마련이라 떠오르는 생각들은 세 달 안엔 결코 쓸 수 없는 거대한 작품들이거나 지난 소설들과 결을 함께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심지어는 내년에 쓸 소설과 주제가 상통하는 상상들이 한 줄기 이야기가 되어 찾아오기도 했다. 그래서 답답했다. 새 소설은 어떠한 첫 문장으로 시작해야 할지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전에 썼던 소설들과 비슷한 주제를 가진 글이면 어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같은 결들의 이야기만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섣부른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거대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이야기 쫓아가는 관찰자이고 싶다. 소설을 시작하는 건 분명 나이지만 결국 그런 나를 끌고 가는 건 소설 속 주인공들이니까. 그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둘레길 산책을 하고, 퇴근 후 이미 발표가 끝난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방송을 민음사 버전으로 시청했다. 아주 작은 영감일지라도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내주길 무의식에 기대어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벽 한 시 즈음, 어렴풋한 형제를 마주쳤다. 아직은 이 친구가 어디로 나아갈지 또 어떻게 발전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고작 세 달 안에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발을 떼어보련다. 그래야 걸을 수 있을 테니까. 완주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창작이라는 신나는 산책길을 또 한 번 걸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