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타샤 Nov 10. 2021

절대 같을 수 없는 아들과 딸


우리 엄마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 무뚝뚝하지만 착하고 바른 장남과 제 멋대로에 티격태격 하지만 그만큼 가깝고 살가운 차녀.

우리 부모님은 아들 딸 차별을 하지 않았다. 여아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뱃속에서 죽어나갈 때 우리 집은 딸이라고 더 좋아했었다. 오히려 딸인 내가 장손인 오빠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랐고, 내성적이고 조용했던 오빠는 거기서 서운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나는 딸로서 엄마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엄마가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그 차녀였다.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여자의 삶으로 그미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 남편과 시댁에 대한 갖가지 하소연을 들어주고, 엄마가 마음이 무거울 때 성숙하게 위로해주고, 혼자 남은 친정 엄마를 보살필 때도 다정하게 따라 나서 준 딸이다.


엄마는 오빠나 다른 사람에게는 늘 괜찮다고 말을 하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식한테 어떻게 그러냐며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말을 안 하고 속내를 삼키면서 똑같은 자식이라는 나에게 와서는 시꺼멓게 탄 속을 토해내곤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감춰진 마음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했고, 또 엄마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그리고 직감적으로 엄마의 삶과 마음을 읽어냈다. 엄마와 나는 딸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삶의 일정 구간의 함께 지나며 끈끈하게 연결되었다. 그것은 말로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 애정과 미움이 뒤섞인 무언의 연대였다.


그런 엄마와 내가 운명을 함께 짊어졌다고 여겼지만 가끔 그것이 환상으로 산산이 부서질 때가 있었다.

오빠가 엄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입원과 수술 퇴원 일련의 과정을 해드린다거나, 휴가 때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을 간다거나 성과비를 받아서 용돈을 두둑이 준다거나 등 그럴 때 엄마는 오빠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다며 입이 마르도록 오빠 칭찬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가 무척 낯설어졌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너무 서운하고 나아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내 기준에서 오빠가 한 일은 내가 20여 년간 엄마에게 쏟은 물리적인 시간, 정신적인 정성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었고 심지어 나도 이미 했던 일들이다. 그럴 때 엄마는 고맙다고 말은 했지만 오빠를 칭찬할 때처럼 든든하다며 반짝거리는 표정까지 지으며 흥분하지는 않았다. 그저 평범한 고마움이었다.

평소에 내가 내 친구들과 비교해서도 나는 엄마에게 무척 잘하는 딸이었음에도 엄마는 오빠에게 그런 일들로 든든하다며 만사 아들 덕이라고 하니 내가 지금껏 들인 노력은 엄마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가 싶었다.

허무해질 지경이었다.


또, 엄마는 오빠가 엄마 말에 대답을 안 한다거나 심드렁하면 "쟤가 저렇지 뭐 에휴"하고 그냥 넘겨버리면서 정작 내가 엄마에게 뭘 거절하거나 짜증을 내면 엄마는 엄청 서운해했다.

내가 아홉 번 잘하다가 딱 한번 엄마에게 못 하면 엄마는 아주 섭섭해하면서 오빠가 아홉 번 내내 무심하다가도 한번 잘하면 세상 효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오빠한텐 미안한 게 많은지 맨날 오빠한테는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이 불공평함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엄마한테 따졌다.

엄마는 “너도 고맙지, 너한테야 늘 고맙지~ 그리고 원래 네 오빠는 그런 애가 아닌데 그러니까 더 고맙고 그런 거지…” 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쓰면서도

‘아, 우리 엄마도 별 수 없는 아들만 좋아하는 엄마인가?’,

‘엄마도 결국은 아들이 최고였네 뭐…’하는 생각에 서운함과 원망, 그리고 그간의 내 노력과 시간이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내 엄마에게 거리를 두는 것과 두 가지 해드릴 걸 한 번만 해 드리는 식으로 마음을 멀어지게 했다.

아이러니한 건 엄마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늘 그랬듯 엄마에게 미안해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생 켜켜이 쌓여온 얽히고설킨 엄마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한 번에 정리할 수가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이런 성차별적인 단어는 너무 싫지만 남자와 여자가 감정과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남녀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신은 왜 인간을 창조할 때 남자에겐 그런 세심함을 주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남자인 아들과 여자인 딸은 같은 자식이 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오빠가 채울 수 없고, 오빠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내가 대신할 수가 없다. 딸인 내가 줄 수 없는 아들의 든든함도 그중 하나다. 아마 전 세계 다 비슷한 것 같지만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특히 집에 큰 일을 치른다거나 할 때 부모님의 마음가짐이나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런 인식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더라도) 여전히 부모님께는 아들이 주는 어떤 안정감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너무 슬프고 속상하지만 그건 딸이고 거기에 둘째인 내가 채울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이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고 내 몫의 효도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오빠가 말썽 한번 안 피우고 바르게 자라서 좋은 직장을 잡고, 때에 맞춰 결혼을 하고 손녀를 안겨드리는 하드웨어적인 효도를 한다면 나는 엄마가 옥상에서 울 때 옆에 있어주는 것, 지독한 시집살이와 무심한 남편에 대한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 엄마가 예쁜 카페에 가고 싶을 때 함께 가는 것, 엄마의 마음을 읽어주는 등 소프트웨어적인 효도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엄마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오빠가 굵직굵직한 일들로 엄마의 어깨를 치켜세울 때, 나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엄마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했다.

예를 들어, 여행을 할 때 여행지에서 늘 엄마에게 우리 엄마여서 고맙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담아서 엽서를 썼다. 퇴근길에는 항상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점심은 뭘 먹었고, 회사에서 과장님이랑 무슨 간식을 먹었고 등 아주 쓸데없고 자잘한 일상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내가 재잘거리는 그 시간을 무척 즐거워했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는 되도록 한 달에 한 번은 꼭 본가에 내려가서 엄마랑 카페를 갔다. 딸과 밥 먹고 카페 가는 그 행위가 엄마에게 엄청난 즐거움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엄마 친구의 며느리 얘기, 사위 얘기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맞장구치며 이야기 듣는 그 순간이 엄마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 것 잘 아니까 그렇게 했다. 그 외에도 엄마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만들어 주기, 퀴노아 샐러드 만들어 주기,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요리꾸리한 외국 요리' 만들어 주기 등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 나는 그런 것들로 엄마의 일상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예정이다.


오빠가 있어 든든하다고 말하는 엄마의 칭찬이 오빠가 나보다 낫다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내가 하는 것은 몰라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빠와 나는 다른 분야를 담당하고 있고 오빠는 자기 몫을 잘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처럼 전화 자주 하는 자식이 어디 있어~ 오빠는 연락 잘 안 하잖아~"고 생색 아닌 생색을 내본다.

작가의 이전글 찬란한 무채색의 도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