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엔 보통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사실 토요일만 그런 건 아니지만 토요일 오후는 특히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평일 오전에는아이들을학교나 유치원에 보내 놓고 충전시간을 갖지만 토요일은 오전부터 상윤이 복지관 스케줄로 바쁘다. 주말이니 웬만하면 스케줄을 안 잡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복지관의 장애인 취미여가 수업은 비용이 저렴하고 질이 좋으며 아이의 흥미도 높아 나의 휴식과 맞바꿀 가치가 충분히 있다.
오전 내내 복지관에서 내가 하는 일은 기다림이다. 나의 업무 공간은 대기실이고 나의 주 업무는 기다림과 아이의 이동을 보조하는 일이다. '아이를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하는 거 아니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진짜 말은 못 하지만 이렇게 글로나마 소심하게 외쳐야겠다. 그럼 병원 접수해놓고 대기실에서 휴식 취하시라고, 미용실에서 순서 기다리며 휴식 취하시라고, 에버랜드에서 줄 서서 휴식 취하시라고...
대기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하며, 책을 읽으며, 수다를 떨며, 혹은 잠깐 졸며 아이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기만 하는데도 기가 쪽쪽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집에 오면 기진맥진하게 된다. 불특정 다수와 함께 있는 이 대기실이란 공간에서, 언제 돌발행동을 하며 뛰쳐나올지 모르는 아이의 상황에 긴장하며 기다리는 이 시간이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니 점점 더 불편해진다.
상윤이가 오래 다닌 센터의 소장님은 자꾸 대기실 소파의 배치를 바꾸시고, 소파 교체도 몇 번이나 하셨다. "이제 좀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나는 웃으며 말리지만, - 마음씀 - 잠시 들렀다가는 보호자들이 편히 지내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씀이 고마운 것이다. 센터는 오래돼 낡았고, 인테리어는 규칙성이 없지만 항상 청결한 게 마치 우리네 어머님 댁 거실 풍경 같아 앉아있으면 낮잠을 자지 않는 나도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진다.
각설하고, 이런 연유로 나의 주말 자유시간을 보장해줬으면 한다. 주 5일 근무도 아닌, 주 4일 근무가 익숙한 나다. 월화수목금토일 주 7일 근무는 나의 노동의 질을 저하시킨다. 자유시간은 토요일 오후가 딱 좋다. 오후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 애 엄마가 아무것도 안 하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지만, 토요일 오후 반나절은 오늘의 할 일은 해놓고 빈둥거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덜 불편하기 때문이다.
웬일로 상우는 아빠와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사냥하러 떠났다. 서울로. 포켓몬 사냥. 지난주 상윤이랑 둘만 다녀온 남산타워 이야기에 부자가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둘만 떠났다. 야호! 신난다. 오래간만에 상윤이랑 둘이 한적한 오후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엄마 좀 놀고 있을게. 너도 아침부터 고생했으니 좀 쉬어. 나는 건들지 말고.
"놀이터!"
휴식은 쉽지 않다. 어른의 에너지는 이미 오전 중에 고갈되었는데 아이의 에너지는 아직 차고 넘친다. 오히려 점심을 먹고 나서 에너지가 더욱 충전되는 느낌이다. 오후 2시 전후의 아이 눈빛은 하루 중 가장 생생하고 몸짓에는 활력이 넘친다.
"상윤아, 우리 오늘 줄넘기도 하고 난타도 했으니깐 오후에는 좀 쉬자."
"네"
'네'는 개뿔. 5초 후에 다시,
"놀이터에 가고 싶어요. 똥 놀이터 갈 거야."
하는 상윤이다.
"그래 가자. 가!"
이 아이는 한 번 시작하면 잠이 들 때까지 놀이터 타령을 끈질기게 해 댈게 뻔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놀이터를 잠깐 다녀온 후 쉬는 편이 현명하다 할 수 있겠다. 신이 난 상윤이는 호다닥 양말을 신고, 문을 열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순식간에 준비 완료하고선 "준비 시~ 땅!"하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런데, 집을 나오자마자 이 녀석 놀이터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김상윤! 어디가?"
"버스 타고 갈 거야!"
외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간다.
"김상윤, 멈춰!"
들리지 않는다. 꽂혔다. 상윤이가 고집을 부리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보기는 둘 중 하나다. 몇 시간 울리든지, 아니면 갔다 오든지. 고민은 좀 있다 하고 일단 이미 버스정류장으로 가고 있는 아이를 쫓아가는 수밖에...
'여기까지 왔으니 아무 버스나 좀 타다가 집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타자.'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는데 하필 가장 먼저 온 버스는 '강남행' 버스다. 어느새 너와 나는 버스를 타고 가고 있다. 놀이터 다녀와서 충전하려 했던 내 휴대폰 배터리는 15%가 남은 상황이었다.
'빨리 목적지를 정하고 서둘러 가는 길을 익혀두자.'
어린이 대공원.
여기가 딱이다. 버스 타고 아이랑 갈만한 곳.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상윤이가 마음껏 뛸 수 있는 곳 같았다. 동물원, 놀이터, 놀이공원 등 다양한 테마가 있어 지루하지 않게 상윤이랑 시간을 보내다 올 수 있을 것 같다. 가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으니 가보자!
검색을 마친 나는 휴대폰을 넣어두었다.
'보나 마나 휴대폰은 돌아올 때 100% 꺼져 있을 테니... 길을 잘 기억해야 할 텐데...'
신논현역에서 내려 논현역까지 걸어가 지하철 7호선을 타고 한강을 구경하며 도착한 어린이대공원역.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의 방구뽕씨가 생각나는 유엔 아동권리협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정말 재밌었는데 그 드라마.'
똥 놀이터 가는 줄 알고 나왔는데 어린이 대공원에 와있는 현실이 황당하긴 했지만 또 막상 이렇게 와보니 설레고, 즐거웠다.
'그래. 시작은 늘 네가 해도, 언제나 그 과정과 끝을 만드는 사람은 나니깐. 오늘도 어쨌거나 너와 나 즐겁게 잘 지내다 집에 잘 들어가기만 하면 되지.'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편의점!" 하고 외친다.
좋아하는 오징어집 과자와 '꼬마버스 타요'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가니' 주스를 골라 나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좋아하는 과자와 주스를 사서 기분이 좋은 상윤이가 이번엔,
"꼬모!"라고 외친다.
어린이 대공원역 벽면은 알록달록 꼬모 포토존으로 꾸며져 있었다. 우리 상윤이 상우가 어릴 적 참 많이 보고, 들었던 '꼬모 팝'. 상윤이가 말이 느려 고군분투하던 시절, 꼬모 팝은 내게 은인 같은 존재였다. 노래를 좋아하는 상윤이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주접스럽기까지 한 율동으로 흥을 돋구웠던 그 시절, 4살 상윤이와 2살 상우에겐 우리 안방이 곧 '베이비 콜라텍'이었다. 상윤이가 어찌나 잘 따라 부르는지 나도 절로 흥이 났었고, 상우는 '엄마', '아빠'를 말하기도 전에 내가 "꼬모~" 하면 "빱!"하고 반응해주었다. 지금은 애정이 식어버린 '꼬모'지만 여기서 만나니 반가웠나 보다. 배터리는 없지만 사진은 찍어줘야겠다. 평소 같으면 잘 나온 한 컷 건지려고 5장 이상 찍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무조건 한방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 아이가 근래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이 있었나?'
평소에는 과묵의 끝판왕인 상윤이. 언어를 강제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는 잘 표현하지 않는 아이인데, 기분이 좋으니 이렇게 말도 한다.
"우리 잘 왔다! 상윤아!"
날은 덥고, 휴대폰 배터리는 없고, 오전 스케줄이 많아 피곤하고, 나는 슬리퍼에 부엉이 가방, 동네 마실 가는 차림으로 아무것도 없이 나왔지만...
상윤이의 말 한마디에 다 괜찮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 이러려고 네 엄마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