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본래
오늘은 아주 가볍게 노트북을 두드려보려고 한다.
그 언젠가,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떤 것을 믿을 수 있느냐는 주제를 도덕 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중학생이던 나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주변의 평가에도 그렇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는 본래 선한 사람!'이라고 마음속으로는 깊이 믿고 있었다.
내키지 않을 때도 선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뒤돌아 그 일을 계속 곱씹으며 후회하는 감정이 밀려왔기에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내 성선설의 근거는 단 하나였다.
내가 평가하는 '나'.
한살 한살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소중해지는 게 많아지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행동에 이익을 따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이익을 따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괴리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어떤 정책이나 아이디어가 새로이 대두될 때, 나는 그와 의견이 달랐다.
정치 갈등이 극으로 치달은 지금 늘 스스로는 진보라고 믿었던 나는 "진보와 보수를 정말 그 의미대로 나눈다면 너는 '진짜' 보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늘 스스로는 진보라고 믿고 살았던 나는 한동안 적잖이 충격이었고, 스스로 무슨 결정을 할 때마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가 보수가 맞는다고 인정한다.
우리나라처럼 보수를 가장한 이익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늘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믿던 스스로는 어느 순간, 인간은 본래 악하고, 절대로 교화되지 않는 성악설의 존재를 믿는다.
확실히 내 생각은 보수적이다.
단지, 악한 정도가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정도인지에 따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갈린다고 생각한다.
좌익과 우익을 나누는 사람들의 생각 차이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다.
좌익은 가능성과 희망에 초점을 맞추고, 우익은 그로 인한 부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좋은 정책과 의견을 들어도, 그 꿈의 이상향에 편승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연상하고선 의미를 오롯이 선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이미 성악설을 믿는 나는 인간의 가능성보다는 그로 인한 부작용들을 더 많이 상상한다.
그리고 이런 스스로를 인정하며 하루하루 적응해오던 지금.
바로 오늘, 다시 한번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본래 악하고, 그 악함이 정말 잘 드러나는 순간은 바로 금전과 연관되는 순간이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노력에 편승하며 삶을 영위하길 바라고,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칼을 꽂으며 자기 행동이 영리한 행동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이미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된 이상, 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꿀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마음 한쪽에는 더는 진정으로 그런 꿈을 꾸지 못한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