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이라는 짧으면 짧고, 길면 긴 나의 인생 여정에서 큼지막한 터닝포인트가 3번이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3번의 터닝포인트는 늘 엄청난 고난을 동반하여 나타났다.
2021년 3월, 3 번째 기적을 향한 새 치료물질을 접하면서 치료물질(불로초 주스) 개발하신 신박사님과의 면담을 하기 위해 전신 PET-PT와 유전자, 텔로미어 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 뜻밖의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나의 유전적 요소 중 가장 조심해야 되는 질병 1위, 폐암과 우울증. 폐와 관련되서는 아버지와의 관련도 있었고, 투석으로 한 번씩 폐부종과 같은 증상이 있기에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뜻밖의 결과는 바로 이 '우울증'이라는 결과였다. 전 회사의 타 부서 사람들이 나를 '해피바이러스'라고 부를 정도로 우울감과 나와는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의 유전학은 아주 매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나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는 소아당뇨라는 병과 머지않아 나타난 뇌전증이라 불리는 간질발작과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뇌전증이라는 첫 번째 합병증이 나타나기 전, 난 그 누구보다도 부정적이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왜 하필 나지? 착하다 소리를 그리도 많이 듣고 자란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고? 다른 사람 이리도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이런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되는 거지?’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혀 나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는 하늘을 원망했고, 늘 내 곁에서 걱정이라는 고통을 주는 엄마를 한없이 원망하며 살았다. 그런 나의 성향과 마음이 간질이라는 합병증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뇌전증이 나를 떠나면서 나의 부정적인 마인드를 모조리 가지고 갔다.(자세한 내용은 나의 첫 에세이, 첫 번째 기적의 기록을 참고해주시길 바란다.) 그렇게 나의 우울증이라는 유전자도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기적은 긍정적인 마음 정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계속 에세이를 쓰고 있었던 두 번째 터닝포인트는 12년 뒤인 2012년 즈음 나타났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터닝포인트도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대학 졸업 전, 학과장 선배와 연인관계를 유지하던 친구는 늘 입버릇처럼 이 말을 했다.
“우리 과 취업은 인맥이 진짜 중요하다. 인맥이 있어야 취업이 가능 하디.”
1학년 때부터 학과장 선배와의 연인 관계에 있던 이 친구는 인연 맺은 과 선배들이 제법 많았다. 이 친구가 늘 하던 이 말에 내 마음에는 늘 가시가 쏫아났다.
‘두고 봐라. 인맥 없이도 충분히 취업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보여주고 말 테다.’
나의 그 생각은 이루어졌다. 태국어과 친구 덕에 알게 된 국가지원 해외 인턴쉽을 통해 아무 연고 없이 베트남 현지 취직을 나 혼자의 힘으로 해내고야 말았다. 당시 베트남 현지로 취직하고자 하는 동기가 별로 없었다. 다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전공을 살리지 않는 길을 선택하던 차에 생긴 나의 선택이 과 내에서는 색다름이었나 보다. 취직되어 베트남으로 떠난 후, 수업 중 교수님께서 나에 대한 칭찬을 그리 하셨다고 한다. 베트남 현지의 의료 체계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엄마가 내 당뇨 인생 처음으로 내 선택을 반대하셨지만, 나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그렇게 떠나게 된 타향살이는 그야말로 나의 세상이었다.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내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뭐 든 할 수 있는 아주 멋진 해외 살이었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 게 우주 진리인 것일까. 거침없고 제한 없던 막무가내의 내 영영이 자유를 얻고, 점차 육체의 건강을 잃어갔다. 그 자유의 유혹이 너무 커 육체가 지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몸이 붓기 시작했다.
휴가를 받아 한국으로 잠시 들어온 날, 부어있는 다리를 보신 엄마가 그렇게 족욕을 시키고, 용하다는 침 치료사에게 데려가고, 철학관을 다니며 별일 생기진 않을지 여쭤보고 다니셨다. 우연히 베트남에서 조연출의 길을 가게 되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정식 PD의 길을 가기 위해, 2년 정도의 베트남 현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오게 되었다. PD라는 직업이 그렇게 매력적이고 재미있을 수 없었다. 내가 맡은 프로그램이 10년 차 선배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둘 정도로 조금은 힘든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으로 들어온 후 조연출 3개월 만에 힘들다고 그만둔 선배 PD 덕에 정식 PD로 급속도 입봉을 하게 되었다. 매주 마무리 지어야 했던 2박 3일 편집기간은 잠을 자지도, 밥을 먹지도 못한 채 보냈다. 그렇게 1년이 되어갈 때쯔음, 몸에 본격적으로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몸이 코끼리처럼 붓기 시작한 것이다. 부산에 내려온 날, 찾은 주치의 원장님께서 당장 일 그만두고 내려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 힘든 일을 하면서도 지난 1년간 힘들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열정을 쏟아부어서였을까. 당시 러브콜도 상당히 많이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재미있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조금만 몸 관리하고 다시 오겠다고 전하고는 잠시 몸 관리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내려간 김에 운전면허 따로 오라는 팀장님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