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이책을 좋아한다. 새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와 페이지 넘기는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주말 아침에 사람이 적은 카페에서 읽는 책들은 멀리 가지 못하더라도잠깐이나마 휴식과 여행을 선사한다. 단점이 하나 있다면, 호기심에 조금씩모여진 책들의 무게가 잦은 이사에는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내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는두꺼운 종이책들 대신 스마트폰과 Kindle로 읽기로 했다. 연동되는 오디오북도 예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지고, 유명인사나 작가 본인의 목소리로 듣는 재미가 있다.
예전에는 서점에서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읽어보며 골랐다면, 요즘은 장르별 검색을 통해 쉽게 고른다.서점 아주머니가 읽어본 재미있는 장르를 추천받는 대신, 나에게 맞춤형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두꺼운 책들을 끌어안고 낑낑대며 계산대에 올려놓던 기억은 이제 희미해지고, 원할 때마다 장바구니를 채워 구매한다.유학 초반 미국 대형서점 Borders가 파산신청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Amazon과 같은 온라인 서점들이 늘어나면서, 그 수요와 편리함을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Borders가 2011년 사업을 접기 전 했던 할인 행사가 기억이 난다. 출처: CBS New York
책을 구하는 일이 쉬워지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을 가서 빌리는 일이 드물어졌다. 도서를 읽는 곳보다는 시험이나 자격증 공부를 하는 곳으로 변모한듯하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책장 사이사이를 훑으며찾아내는 진주 같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대학생 때는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치고는 했다. 아쉽게도 수요가 많지 않은 낡은 도서들은 전자책으로 옮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학교 도서관에 있는 귀한 도서들을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아쉬움을 남긴다.
이제는 책장을 보며 고르지 않아도 전자책 앱에 수십 권이 들어있다 보니 스마트폰을 열기만 하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다른 앱을 기웃기웃하게 된다. 찜했던 영화를 보기도 하고, 관심도 없던 동영상을 이것저것 클릭해본다. 그마저도 지루해지면 10초씩 되감기를 하며 대강 줄거리를 보고 끈다. 산만함 속에서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원래 페이지로 돌아가야 하는데, 결국은 그다음 날로 미루기로 한다. 그러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해진 서재는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 차 있다.
Proust의 책들은 섬세한 표현이 많아 길기로 유명하다. 요약된 줄거리는 왜곡에 가깝다. 출처: New Yorker
읽을 것은 많아지고 방법은 간단해지는데, 정작 읽는 양은 줄어든다. 업계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100장이 넘는 보고서를 10분 만에 휘리릭 읽어내는 사람들이 많다. 촉박한 시간 안에 중요한 정보를 빨리 찾는 습관을 들인 덕분이다. 단축키로 찾는 단어를 입력하고 키보드를 연달아 두드리다 보면, 찾는 정보가 맞는지 아닌지 신속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생긴다. 급하게 프레젠테이션 준비나 보고를 해야 할 때는 정말 중요하지만, 이런 버릇이 문학과 철학을 읽을 때에도 번지다 보니 속독이 점점 익숙해지는 듯하다.
요즘은 사건사고가 터지면 5분 안에 속보가 인터넷을 메운다. 가끔씩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극적인 제목들이 눈길을 이끈다. 누군가의 잘못을 판단하기에 시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불같이 번지는 소식은 조금씩 시작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기도 한다.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이미 짧은 기사나 책 내용을 요약해주는 서비스도 생겨났다. 게다가 요약본을 더 요약해 몇 문단만으로 내용을 압축하는 영상들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감상과 이해보다는 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진 것 같기도 하다.
3년 전 북클럽에서 첫 번째로 읽었던 책이다. 재무제표와 코딩에 파묻혀있던 사람들에게 잊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출처: Amazon
작년까지는 친구들과 함께 북클럽을 했다.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이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카페에서 책을 하나씩 골라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투자은행, 컨설팅 등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내준 귀중한 1시간은 잠시나마 느리게 걷는 시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었다. 글자와 숫자 몇 개만 급하게 주머니에 욱여넣고 달리던 다른 날들과 달리, 이렇게 작은 문장에 새겨진 의미를 다시 느껴보는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작년 성탄절에 선물 받은 종이책은 천천히 읽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