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 찰떡 여행메이트를 발견한 그 날.
결혼 준비 중 나를 가장 크게 웃게 했던 것은 ‘신혼여행’이었다.
아주 어릴 때, 결혼을 해야겠다는 확신조차 없었을 20대 중반부터 나는 막연하게 신혼여행은 몰디브로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텔레비전에 나온 바다 속 레스토랑 때문이었다. 이국적이고 한가해 보였던 장면에 매료되었고,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에 몸을 담그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30대 초반 결혼 이야기가 나왔던 남자와 헤어지고 난 뒤에 ‘이제 몰디브는 못가보겠구나.’라는 생각이 앞섰을 정도로 몰디브는 나에게 신혼여행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짝꿍에게 ‘우리 몰디브에 갈거야.’라고 말했고, 다행히 그는 ‘난 여행은 잘 모르니까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라고 답변해 주었다. 몰디브는 평화로웠다. 가는 길도, 숙소에서도. 문제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여행지 ‘싱가포르’였다.
몰디브에 가기 위한 항공 노선은 세 가지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직항은 사라졌고 카타르, 아부다비,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세 가지 노선이었다. 더위에 취약했던 남편을 배려하고, 괜찮은 시간대의 비행을 계산에 넣으니 싱가포르 경유가 베스트였다. 더군다나 싱가포르는 깔끔하고 치안이 좋다니 신혼여행지로는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어 2박 스탑오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나에게 여행은 ‘쉼’이 아니라 또 하나의 ‘경험’이자 ‘관광’이었다. 고대 유적지를 좋아했고, 의미 있는 건물이나 공간에 머무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싱가포르 여행도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 그 전날 결혼식을 치르고,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오전 9시 비행기를 타고 5시간을 날아갔는데도 여전히 나의 마음은 바빴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푸르고 시내로 나섰다. 대중교통이 잘되어 있었고 대부분 가게에서 카드를 받는다는 말에 현금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은 채로. 문제는 여기에서 생겼다.
여행 전에 넷플릭스에서 보았던 싱가포르 여행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맛집에 꼭 가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터라 무작정 첫날 식사는 ‘맥스웰 호커 센터’로 정했다. 호텔에서 웰컴 드링크까지 한잔 잘 챙겨먹고 나니 새로운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넘쳤다. 구글 지도를 살펴보니 호텔에서 호커 센터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호기롭게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며 걷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도시에서, 지도를 보며, 더운 아스팔트를 20분 걷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15분 정도 걷고 있으니 땀이 쏟아졌다. 게다가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돌고 나니 맥스웰역이 보였다. 역 근처에 호커 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블로그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간 블로그에서 ‘호커 센터에 가시는 분들은 현금을 꼭 챙겨야 한다.’는 문구를 보고야 말았다. 우리는 현금이라고는 한푼도 없는데. 우리나라로 따지면 로컬 시장의 푸드코트 같은 곳이니 어쩌면 당연한데, 그 사실을 생각지도 못했던 나에게 화가 났다. 그때서야 근처 ATM기를 부랴부랴 찾았다. 구글맵에서 검색을 해보니 근처 ATM기는 걸어서 십여분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나만 믿으라고 데리고 온 호커 센터인데! 주변에 현금인출기는커녕, 은행도 다 문이 닫힌 상태였다. 더위에 지쳤고, 다리는 아파왔고, 배가 고픈 상태로 출발했기 때문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맥스웰역에 가서 역무원에게 ATM기의 위치를 물어본 뒤에 근처 차이나타운에서 다행히 수수료가 비싼 현금 인출기를 발견했다. 간신히 현금을 인출하고, 남편을 돌아보았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울그락붉으락하는 내 얼굴을 보고는 남편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자기가 영어를 잘해서 금방 현금인출기를 찾았네!”
다른 걸 먹어도 된다는 사람을 꼭 여기서 먹어야 한다고 짜증을 내며 데리고 왔는데, 웃으며 나를 칭찬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괜히 울컥한다. 나 때문에 망친 여행 첫날, 그는 웃으며 한국과는 또 다른 이 분위기가 신기하다며 더 걸어도 좋다고 말했다. 호텔에서 출발한지 1시간 30분이 지난 후에야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도.
배가 고팠던 만큼, 그 어느 때 보다 맛있게 밥을 먹었다. 락샤, 치킨라이스, 맥주를 먹고 우리는 덥고 조금 지저분한 그 공간에서 새로운 맛에 취했다. 오길 잘했다고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불현듯 ‘나 참 좋은 짝꿍을 만났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순간에야 서서히 올라오는 행복. 자기보다 영어를 잘한다고, 여행에 오니 의지가 된다며 나의 좋은 점만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늦은 확신이 생겼다. 그를 통해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화가 가라앉는다. 둘이 함께 거리를 헤매이던 것도 순식간에 좋은 추억으로 마음에 내려앉는다.
첫날 길을 잔뜩 헤매고, 늦은 저녁을 먹게 된 탓에 우리는 슈퍼트리만 간신히 보고 마리나베이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좋은 추억’이 되었으니까. 길을 헤매게 되더라도 외롭지 않게 옆에서 나를 잡아주고, 여행지에서 화가 나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짝꿍이 드디어 오랜 세월을 건너 내 옆에 자리 잡았다. 그동안 나의 여행은 대부분 ‘여자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늘 검색창에 ‘여자 혼자 여행’, ‘여자 혼자’, ‘혼자 여행’ 등의 키워드로 여행지를 검색했고, 치안을 걱정했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면 대부분 맞춰주는 입장이었는데 사실 그게 불편했기 때문에 혼자 여행하는 걸 택했었다. 홀로 남겨져 조금 외롭더라도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좋았으니까.
그런데, 드디어 내 멋대로 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인생의 짝을 만났다. 앞으로 우리 삶에 수많은 장애물이 있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짜증이 나서 투정을 부리기도 할테고, 어떤 날은 그가 나에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길을 헤매다 지친 나에게 칭찬해주던,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화를 내지 않았던 그를 기억해야겠다. 우리의 첫 번째 해외여행에서 해맑게 웃던 미소를. 새로운 여행으로 그를 더 웃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나의 초심이 그곳에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