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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안 Jan 12. 2023

아니,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벼락 백수가 될 줄은

스타트업 직장인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였습니다.


전 날 재택근무를 하며, 카페에서 밤늦게까지 제품의 최적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개선된 성능 지표를 정리한 뒤, 새로운 방식의 개선을 시도한 내 자신에게 약간의 뿌듯함과 얼른 출근해서 디자이너분께 재잘재잘 이만큼 빠르게 만들었다며 보여줄 심산이었습니다.


내일은 어떤 최적화를 시도할지 계획하고, 사내 스터디가 있는 날이니 일찍 출근하여 스터디할 부분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늦은 시간에 대표님께서 갑자기 다음 날 오전 미팅을 요청하셨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 불현듯 자기 전에, "설마.. 나 잘리나.."


회사 운영이 어려운 상황인 것은 알고 있는 상황이었고, 다 같이 힘을 모아 마지막 불씨를 태우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느닷없는 대표님과의 미팅이라니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 저연차인 내가 나가는 게 자연스럽긴 해..라는 다소 현실적인 생각을 하며, 아무리 그래도 뭔 그런 재수 없는 생각을 사서 하냐며 얼른 생각을 흐트러트리고 잠에 들었습니다.


일찍 출근해 커피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얼어 죽어도 아이스를 고수하며 테이크 아웃한 아아를 들고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주로 공유 오피스 로비에서 일을 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경치도 좋고,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비에 짐을 놓고 있으니 일찍 출근한 CTO님께서 티타임을 요청하셨습니다.


괜스레 너스레를 떨며 카페까지 가는 길.

커피를 받고 나서 천천히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겉옷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하시는 CTO님을 보며 멀리 나가서 해야 하는 이야기구나 하는 짐작은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비즈니스 아이템을 매각할 것이고, 당장 내일부터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

이미 결정된 사안에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기에

그렇군요라는 어떻게 보면 차가워 보이는 말을 뱉으며 덤덤하게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다다르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던데,

처음으로 애정을 갖고 만들었던 우리의 제품이, 우리가 이렇게 끝난다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제품과 팀원들과의 추억이 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보단 임원 분들이 힘들었으면 더 힘들었으리라 짐작하며, 최대한 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했습니다만 제어 없이 떨어지는 이유 모를 눈물들에 빨리 울음을 그치자며 혼자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눈물은 단지 내가 코어 인력에 들지 못해 따라가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후회는 없지만 끝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워서, 내가 봤을 땐, 분명 내 감은 우리가 성공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끝났구나 하는 아쉬움이었습니다.


멋이 없지만 오해가 없길 바라며 운 이유를 설명드렸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눈코가 빨간 동료들을 보며 따로 내색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인사를 나눴습니다.


하필이면 오랜만에 아이라인을 그리고 와서 번져버린 눈을 보며,

저는 동료들의 충혈된 눈을 보며 현재의 상황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누구 하나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고 최대한 평소처럼 웃어넘겼던 것 같습니다.


이후 진행된 대표님과의 미팅은 일부러 웃으며 들어갔습니다.

부을 대로 부어버린 눈과 함께 손에 쥐고 있는 휴지들을 보아하니 이전에도 누가 다녀갔던 것 같았습니다.


누구보다 열정 있던 대표님이었기에 누구보다 슬프겠거니 생각하며 참아보려 했으나 또 비집고 나와버린 눈물과 울렁이는 목소리는 헛기침으로 숨겨지지 않았습니다.



누구 하나 몹시 슬픈 기색을 표현하는 이는 없었으나 아쉬운 마음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들이 사무실에 계속 머무르길 몇 시간,


저 또한 채비를 하고 일찍이 퇴근을 하여 집으로 갔습니다.

역에서부터 집까진 걸어서 20분 거리, 한파 주의보와 함께 눈이 내렸던 그날

역 출구를 나오자마자 주룩주룩 나오는 눈물에 볼과 입술이 터 따가워지는 것을 잔뜩 느끼며 이게 대체 무슨 주책이냐며 혼자 생각하며 집까지 걸어갔습니다.


평소에 먹던 닭가슴살을 놓고 치킨을 시켜 오랜만에 드라마도 보고, '마 도주이 니!'

재벌집 막내아들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렇게 잘 시간이 훌쩍 넘어 새벽이 되니 또 쏟아지는 눈물에 하염없이 울다 일어나니 포켓몬스터의 웅이가 되어있었다고나 할까요


원래 쌍꺼풀이 있던 눈인데 이건 ktx 타고 가다 봐도 운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아.. 짐 가지러 회사 가야 하는데 큰일 났네


평소에도 그렇게 기운 넘치는 캐릭터가 아니니 적당히 눈만 안 마주치면 안 들키겠거니 생각하고 출근했습니다.

개뿔 출근한 동료는 옆모습만 보고도 울었냐며 대체 얼마나 울었냐며 주책맞게 크게 말해서 안 울었다고 수습해 봤지만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신경 쓰였는지 계속 티타임을 갖자는 동료의 말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눴고 중간에 또 울컥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한 번 쓱 닦았습니다.


"이제야 00님 진짜 성격을 알겠네요"

동료는 전날 미리 상황을 알고 있었고, CTO님과 얘기를 나누며 그래도 하안님은 긍정적이고 덤덤하시니 아무렇지 않게 잘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었다고 했다.

하긴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왜 안 울고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본인이 경솔했다라며 중얼중얼


그런 게 뭐가 뭔들 대체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정신적으로 힘들기를 이틀, 공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경기 침체, 외환위기, 불경기, 고용 시장 악화 기사와 국내외 반응들


현실은 슬퍼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게 만들었고 바로 다음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며, 여행과 휴식을 즐기다 취업을 할까 한다는 동료들을 보며 내심 부러웠던 것 같다.

나는 왜 항상 여유가 없지, 왜 나만 조급하지, 그래 부족하니까 열심히 하는 게 맞지..


쉬면서 불안해할 것인가, 지치더라도 해야 하는 것들을 하면서 불안과 멀어질 것이냐

내 선택은 항상 후자였고, 그래서 이룬 것들이 많아 욕심을 놓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도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기 위해 이력서를 계속 업데이트하고, 주변 지인들을 통해 피드백도 받고, 놓쳤던 근본적인 기술 공부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작년의 연말은 유독 쓸쓸했던 것 같습니다.

성향 상 참 외롭단 생각을 잘 안 하고 느끼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 시기는 참 무거웠다 해야 하나.


바쁘다며 온갖 핑계를 대며 연말에 꼭 올라가겠다며 부모님께 다짐한 본가행은

주말 당직을 해야 할 것 같다며, 너무 바쁘다는 거짓말로 무마했습니다.


엄마 : "그래도 바쁘다니 다행이네~ 요즘 경기 안 좋다고 난린데"


무슨 비련의 청춘 여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적재적소에 이런 말을 읊던 엄마가 떠오른다.


취업에 성공하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며, 이번 설에도 바빠서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라는 밑밥을 조금씩 깔아놓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그렇게 오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나 : "어 어디야?"

엄마 : "집 가는 중~ 목소리에 왜 힘이 없어~"

나 : "뭐.. 그냥 들뜰 일은 딱히 없으니까?"

엄마 : "ㅋㅋㅋ 그렇지 ㅋㅋㅋ 퇴근했어?"

나 : "나 백수였어"


이게 뭔 말이야 하며 되묻는 어머니의 질문에 회사가 망했던 얘기, 그리고 방금 전 만족스러운 처우로 합격했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혼자 속 좀 상했을 텐데 고생했다는 얘기, 어우 골 아파 죽는 줄 알았지~ 그래서 연말에 안 갔어~ 까딱하면 설도 안 가려 했는데 붙었으니까 한 번 가야겠네하며 적당히 깔끔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내가 이렇게 멘탈이 약했나 싶은 나날들도 있었고, 내가 무슨 깡으로 이러나 싶은 나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불안해지기도, 자기 객관화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갑작스레 흔들리는 자기 확신에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왜 항상 이렇게 얼레벌레 사는 거지 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주변인들 덕에 도움을 많이 받아 고맙고 행복하기도 하면서 꼭 성공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얼레벌레 또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음에 그래도 생각보다 자비로운 세상에 감사하며,

과거의 선택들은 앞으로의 최선의 결과를 위한 기반이었음을 계속 떠올리며,

다시 달려 나가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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