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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안 Aug 22. 2022

나를 위한 페르소나 또는 방어기제

데일 카네기 - 인간관계론

2022.08.20 작성 _


- 본인은 본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 본인은 본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때와 사람에 따라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 두 질문이 현재를 사는 내 자신에게는 조금의 난제와 같게 느껴진다.


어느 날 지인이 기획한 로맨스 공연에 초대받아 다 같이 모여 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내게 로맨스를 좋아하느냐 물었다.

단호하게 "아뇨. 안 좋아해요"

일행 : "예 그럴 것 같아요"


그렇게 단호히 대답할 수 있던 이유는, 지독한 경험주의자로서 과거를 되짚어보았을 때 로맨스로 유명한 그 어떤 영화나 소설을 보고 읽어도 딱히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극장의 맨 앞줄 정 가운데 앉은 상태로 연극은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뺨 위를 흐르다 못해 버티지 못하고 뚝뚝 허벅지로 떨어지기까지 하는 눈물을

웃기지만 나름의 작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눈물을 훔쳤다.


남 앞에서 우는 것이 싫어 영화도 혼자 보는 것을 좋아한다.

같이 슬픈 영화라도 보는 날엔 몰입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까지 할 정도니까.

 

공연이 끝나고, 내 바로 옆 지인은 내가 우는 것을 보았다며 신이 난 채로 일행에게 공표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공연에 초대해준 지인마저 처음엔 믿지 않았으니 평소 내가 어떤 이미지였던 건지


그때 내가 남긴 감상평 "나 로맨스 좋아하네..."


이후로 나는 로맨스 소설도 거리낌 없이 집어 들고 곧잘 읽곤 한다.


이때 깨달았던 것 같다.

내 불호가 사실은 나의 호일 수도 있다는 것.

내 호가 사실은 나의 불호일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그때부터였다.

단순한 흑백논리에 불과한 나의 호불호는 내 취향과 내 자신을 대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게



글의 서두에 제시한 두 가지 질문을 기억하는가

첫 번째 질문, 본인은 본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에 대해 지금의 나는 글쎄요?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위와 같은 질문에 어느 정도 '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제법 웃기다. 1년의 경험치를 더 쌓았지만 왠지 모르게 역행한 듯한 대답이지 않나.


하루를 사는 나는 좋아하던 것들을 멀리하게 되고, 싫어하던 것들을 좋아하게 되고,

못하던 것들을 하게 되고, 안 하던 것들을 하기도 하더라


꽤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직 나는 나를 모르겠다.


어쩌다 수술을 하게 되어 오랜만에 생긴 휴가에 요양이나 하며 책이나 실컷 읽어야지 생각했던 그 어느 날

추천받은 책 사이에 그동안 장바구니에 담아만 두던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같이 결제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일반적인 자기 계발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땐 금방이라도 책을 덮을 기세였다.


이 책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본인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한다 주장하며, 그 갈망을 통해 인간관계를 다루는 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그중 인정과 칭찬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솔직하게. 진심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평생에 걸쳐 그 말을 보물처럼 여기고 반복할 것이다. 당신이 그 말을 잊은 다음에도 몇 년씩이나 반복할 것이다.


이 문장을 마주하고 내 시선이 오랫동안이나 그곳에 고여있던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언제부턴가 나는 나의 칭찬과 인정이 누군가에게 무례한 평가로 비추어질까 봐

또는 불필요한 부담을 얹는 것일까 봐

(마치 애늙은이, 사람 좋다, 착하다 등의 말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처럼)

또는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대부분은 모종의 이유들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에 담아만 두고 있었다.


꽤나 인색한 멋없는 어른이 됐더라.


아~주 어린 날의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말하는 것에 대해 크게 거리낌이 없었고,

사람에게 곁을 내어주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21살에 2년 반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첫 회사에서 악으로 깡으로 눈물의 사회생활을 했었다.


악명 높은 팀에 들어온 21살 막내가, 23살엔 30명이 넘는 그 팀의 팀장을 하고 있었으니,

정말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겠는가, 당연히 성향도 말도 안 되게 변하더라.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감정은 빼되, 진심으로 대하고자 노력했다.

진심은 통한다라는 마음 하나로 사람들을 상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진심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더라.


당신들처럼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않겠다.
어린 게 굽힐 줄 모른다 욕 먹을지언정, 난 앞뒤가 같은 사람으로 살겠다.
흠집 내려는 노력들 참 가상하나, 내 그 어느곳에도 아무런 영향을 줄 순 없다.


2년 반이 넘는 시간 중 반절 정도는 매일 혼자 울며 버텨낸 그 곳에서 매일매일 되뇌던 생각들이다.


수백 번 수만 번 수십만 번 속에 갖고 있던 이것 덕분에, 또 그러한 경험들 덕에

나는 무섭게 성장했고 단단해졌다.


그곳을 나오는 날, 진심으로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었다.


참 많이 부족했던 사람이지만 당신들이 있었기에 내가 성장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 20대 초반은 오래도록 당신들과 함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같은 정도의..


장문의 인사를 남긴 후 쏟아지는 연락에 자리에 앉아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본인에게 영향이 있을까 굳이 내게 직접 표현한 적은 없지만 항상 멋있고 대단하다 생각했다거나,

무엇을 해도 성공할 사람이라거나, 나를 뒤늦게 알아봐 미안하다며 뒤늦은 죄책감에 나보다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창 힘들 때 그런 얘기들 좀 해주지

근데 뭐 그렇지 않아서 내가 더 잘 견뎠다.

기댈 구석이 없어야 매섭게 성장할 수 있어서



여하튼

결국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결국 나 또한 타인의 인정을 받고자 했구나 하는 쌉싸름한 생각도 들었던 날이었다.




그때 터득한 것은 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속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곳에서의 생존을 위한 나만의 기술이자 방어기제였다.


이것이 관성처럼 자리 잡히다 보니,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평을 자주 듣곤 했다.

철딱서니 없지만 나는 이 말이 딱히 부정적으로 들리진 않았던 것 같다.

사적으로 내게 기대하는 게 없으니 그만큼 나는 조금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으니까


날씨와 습도 일행 타이밍 안주 모든 박자가 맞아떨어졌던 그 어느 날이었나

재밌게 놀고 난 다음 날 일행을 통해 뜻밖의 연락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찔러도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았는데 풀어진 모습을 보고 사람이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고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고


내가 너무 나를 보여준 것 아닌가, 내 이미지는 어떡하지

근데 이것도 내가 맞긴 한데 두고두고 약점이 되겠구나 하며,

당시에 나는 이 연락을 받은 후 쏟아지는 자괴감에 눈을 질끈 감았었다.


결과적으로 걱정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했으면 좀 바뀌고 힘을 뺄 만도 한데 사람이 쉬이 변하지가 않는다.

내게 감정을 표현하고 나를 보여주는 것은 생각하는 그 어떤 정도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좀 논리적이지가 않다. 많이 모순적이기도 하고 그 과정이 간지럽다.


본인을 떠올릴 땐 갖고 있는 다양한 입체적인 면과 경험들에 의존하고,

은연중에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서술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감정이 있다가도 없고, 재미가 있다가도 없으며, 부지런하다가도 게으르고 누군가한텐 한 없이 어렵고 누군가한텐 맞춰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서술어에 대한 모든 반의어가 나를 다시 서술할 수 있다.


그래서 그냥

특별한 서술없이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게 좋다.

보이는 대로 알아서 생각하면 얼마나 편한가 작위적이지도 간지럽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문제와 마주치고, 다른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인류의 가장 커다란 폐해가 생겨난다.
- 알프레드 아들러, 삶의 의미


성향 차이라는 변명 아래 꽤나 타인에게 무심하게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앞뒤가 같은 투명한 사람이고자 하는 개인적인 지향 또한

원래 무관심한 성격이라며 노력하지 않는 나에 대한 합리화의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쯤 되니 드는 생각은..

과연 나의 본성은 무엇인가

지금 난 현대를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낸 페르소나인가

또는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 경험주의자의 방어기제인가


내가 원하는 것이 날 것의 나인지 완벽한 페르소나인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날 것의 나로 살아가기엔 상당히 피곤해서,

최대한 단순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이자 소망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건지


단순하게 생각하고 살던 내가 답이 나오지 않는 사유를 굳이 하고 있는 이유는

그래도 사람이 너무 고여만 있으면 안 되니까

한 번씩 물도 갈아주고 물 웅덩이도 넓혀놔야 표면적이 넓어지지 않겠나 싶어서


요즘 내 성향을 조금씩 놓아보는 연습을 조금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새로운 내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아서 적잖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건조 인간이 반건조 인간이라도 되려고 노력 중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싶기도 하고,

그동안 서운했을 지인들을 생각하니 마음 깊은 곳이 쿰쿰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근데 어쩌겠습니까

고집 센 개인주의자에 말보단 행동이 편한 사람이라

저도 참 쉽지 않은 걸요


그래도 뭐

서두에 띄운 두 난제를

계속 고민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내가 좀 더 자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네 뭐 언젠가 해결할 난제들을 위해

일단 계속 살아가 보겠습니다.





- 2022.08.20 -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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