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밤이 좋아.
#11. 토요일, 저녁 7시
저녁인 지, 밤인지 헷갈리는 시간대에 연희와 선우는 밥을 먹으러 대학가 거리로 나왔다. 말을 트고 나니, 한결 친해진 느낌이었다. 이제 둘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자연스러운 일행 같아 보였다.
빠라빠라 빠라바~.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크락숀 소리에 연희가 깜짝 놀라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앗! 연희야."
선우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재빨리 두 팔 벌려 연희를 감싸듯 뒤돌아 서며 연희를 막아섰다.
"괜찮아?"
연희보다도 더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희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선우가 물었다.
"어. 덕분에, 고마워."
선우의 울타리 안에서 연희의 볼이 수줍게 선우의 어깨에 닿았다.
선우의 심장 소리와 함께 연희의 심장 소리가 합창을 하듯 박자 맞춰 쿵쾅거렸다. 이 멋쩍은 상황에 선우는 항복이라도 하는 듯 두 팔을 들고 쓰윽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 멀리서 둘을 알아보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 이게 다들 누구야?"
쇳소리가 섞인 듯 괄괄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선우와 연희, 둘 다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놀라서 동시에 돌아본 그곳엔, 연희의 동아리 친구이자, 선우의 과후배인, 민아가 서 있었다.
"어! 진짜, 맞네. 근데, 둘이 모야? 사겨?"
민아는 검지 손가락으로 둘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멀리서 보기에는 방금 두 사람이 포옹한 듯 보이는 모습을 다 지켜본 듯, 둘 사이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어...? 무슨 그런..."
연희가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금세 친해진 것 같았는 데, 당황하는 연희를 보니 선우는 조금 섭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아무 사이가 아닌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변명이 필요한 것 같았고, 선우가 침착하게 대응을 했다.
"아, 같은 교사 연구회 회원이라 오늘 모임 마치고 밥 먹으러 나왔어."
"어! 더 이상한데? 연구회에 사람이 둘 밖에 없어?"
민아는 눈을 감은 듯 만듯 게슴츠레하게 뜨고 둘을 번갈아보며, 계속 추궁을 했다. 이미 선우의 마음을 알고 있는 민아였다.
"아! 다른 분들은 다들 기혼자라서 집에 일찍들 가셔야 한대서..."
이번에는 연희가 서둘러 거짓 변명을 했다.
"근데, 넌 지금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근데, 선우는 어찌 알고?"
"어. 선배는 나랑 같은 과잖아. 글구, 지난주에 나 임용 1차 쳤어. 오늘은 2차 준비하러 도서관 왔다가, 이제서야 밥 먹으러 나왔지."
"잘 됐네, 그럼 같이 밥 먹어. 오늘 내가 살게."
연희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자연스레 민아로 화제를 돌렸다. 대학 시절에는 셋이 이렇게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원래 늘 밥 먹던 사이처럼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민아의 등장으로 서로 더 편해진 느낌이었다.
"근데, 잠만, 언니, 왜 선배한테 반말해?"
"어! 하하, 나도 오늘 알았는 데, 선배가 빠른 93년생이래 그래서 나와 동갑."
"그래? 이거 족보가 이상하게 꼬이는 데... 나도 걍 이름 불러야 되나?"
"야, 인마. 너는 94이면서 선배라 불러야지. 내 동기들 모두 92이다. 어디, 감히?"
민아의 말에 선우가 봐주기 싫은 듯 발끈했다. 연희는 재수생이어서 민아보다는 한 살 많지만, 민아랑 동기라는 이유로 편히 말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에이, 선배. 나 뭔가 좀 억울한 거 같아.. 크크"
"뭐, 호칭만 선배지. 너도 존대 안 하긴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이름 부르고 싶다아~."
"뭐래? 까불지 말고. 밥이나 먹어. 벌써, 밥만 먹고 취한 건 아니지?"
"하하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밤. 연희는 그동안 보고 싶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서, 오늘 낮의 아픔은 벌써 오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렇듯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시험에 붙었든 떨어졌든, 직장이 있든 없든, 함께 할 때 즐겁고 행복하고 따뜻해야 할 터인데, 돈으로, 직업으로 급을 나누고 끼리끼리 만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여 연희는 연신 웃으면서도 술 취한 듯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선우와 민아는 예전 대학시절의 이야기로 계속 웃음꽃을 피웠고, 모처럼, 그들 모두 보통 청춘들의 토요일 밤 같은 토요일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토요일 밤. 오늘만 같다면, 토요일은 밤이 좋다고 연희는 생각했다.
"선배, 우리 이렇게 밥만 먹을 게 아니라, 맥주라도 한잔 해야 되는 거 아냐? 나 정말 1년간 금주했는데..."
"근데, 내가 차를 가지고 와서..."
"아, 까짓 거 대리 부르면 되지. 오랜만인 데, 한잔해."
"연희는 괜찮아?"
선우가 연희의 눈동자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병맥 한 병씩만 마실까?"
"나, 일 년간 금주했는 데, 꼴랑 한 병이 뭐야? 난 좀 봐주라. 얻어마시는 김에 질팡 마실려니까..."
"으이고, 민아 이 녀석. 옛날 실력 나올까 무섭네."
"크으~ 이제 나도 늙었어요, 선배. 그만큼 못 마셔요."
민아와 선우는 옥신각신하며, 호프집을 골라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한 후, 연희가 잠시 화장실을 다니러 갔다. 민아는 때를 기다린 듯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선배, 얼릉 말해 봐. 아직 연희 언니에 대한 마음 그대로야?"
"뭔, 소리하냐? 그냥 조용히 맥주나 마시자."
"아직, 맥주 안 나왔잖어. 빨리, 솔직히 말해봐. 내가 임용 붙으면 확실하게 밀어줄 테니까. 언니 전남친 결혼했잖아."
이 말 한마디로 선우는 연희와의 두 번째 만남이 떠올랐다.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던 그 이유가 다 설명되는 듯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추측만 했던 날. 그 날일 것이다. 비행기 사진 하나로 미련도 없이, 후회도 없이 날아가버려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던 그날.
"그래서? 그래서, 연희도 곧 결혼하고 싶대? 더 괴롭기만 할 것 같은데..."
"뭘, 괴로워? 선배처럼 멋진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그게 바로 행복이지."
"내가 또 뭘 그리 멋지다고? 이 녀석, 대학때 밥 좀 사줬더니 그냥 쉽게 편드네. 하하, 이 간신배..."
"아냐, 난 진심 선배 응원해. 언니 전 남친도 알거든. 남자가 좀 우유부단했어. 조금은 마마보이스러웠고... 선배는 적어도 마마보이는 아니잖어."
"사람 마음이 통하는 데도 다 때가 있는 법. 아직은 때가 아니야."
"또, 이상한 선비 같은 말을..."
"쉬잇~, 저기 연희 온다."
연희는 자기 때문에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를 감지했다.
"모야? 내 욕이라도 한 거야? 하하, 빨랑, 둘 중에 한 명 화장실 가봐."
어색한 분위기를 다시 띄우려 연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문한 맥주가 나왔고, 셋은 그렇게 토요일을 젊은이들의 즐거운 열기로 가득 채웠다. 아직은 한창 웃고, 웃고, 또 웃어야 할 20대. 그 청춘들은 웃고 있어도 아팠다. 오래된 짝사랑에, 오래된 이별에, 오래된 취업공부에.
그래도, 셋에게 공통적으로 좋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청춘이라는 이름을 붙여 함께 할 수 있는 토요일 밤. 셋이 함께하는 날이라서 좋았던 밤. 이 세 명의 청춘들에게 오늘은 그저 좋기만한 토요일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