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리 집은 마당이 넓어서 개를 키우기가 좋았다. 바로 옆집의 부부가 마당에서 개를 묶어 키웠는 데, 개가 다 크면 그냥 잡아 먹었다. 어떻게 키우던 개를 잡아 먹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그 개를 잡았을 때 우리 집에도 가져왔는데, 나는 정색을 해서 먹지 않았다. 하지만 딸 애는 보신탕을 아주 좋아해서 잘 먹었다. 그런데 이 집이 낡고 오래된 기와집이라 쥐가 많았다. 겨울에는 이 쥐들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여러 차례 놀래기도 했다. 새앙쥐들은 책 꼿이 틈새로 다니기도 했다. 어떤 때는 부엌에 쥐덫을 놓으면 한 꺼번에 여러 마리가 잡힐 정도였다. 그러면 나는 쥐를 겁내서 근처도 못갔는데 딸 아이가 옆집의 남율이와 함께 겁도 없이 그 덫을 개울 가로 가져가서 수장을 시키곤 했다. 딸아이가 의외로 겁이 없는 편이다. 나중에 미대를 졸업한 딸 아이가 어학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독일로 유학을 간 적이 있었다. 도착해보니 다들 대학원도 졸업하고 어학 공부도 많이 한 것 같다고 하면서 자기는 가방 하나만 들고 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를 닮아서 그런지 딸 애도 무모한 편이 많다. 그래도 어학 코스도 우수하게 잘 마쳤고, Bremen 미대에서 미술 대학을 다시 졸업한 다음 지금은 바이마르에 있는 Bauhaus에서 석사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있다.
이 집은 낡아서 쥐만 많은게 아니다. 겨울에는 보일러를 아무리 때도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당시 한 달에 기름값이 30만원 가까이 들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거진 백만원 가까이 되는 값이다. 그런 상태에서 보일러가 가끔씩 고장을 일으키면 집은 완전 냉골로 변했다. 한 번은 우리 가족이 겨울 날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아이가 말했다. "아빠, 우리 모텔가자." 집이 얼마나 추웠으면 이 어린 애가 따뜻한 물이 나오는 모텔로 가자는 말까지 했을까? 오래 전의 일화지만 지금도 그런 말을 하는 아이의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하다. 덕분에 추운 겨울 날 서생원과 동거하면서 덜덜 떨면서 몇 년을 보냈다.
추위를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잊지 못할 경험이 하나 있다. 1980년대 중반 나는 도봉산에 사는 친구의 연립 주택에서 함께 산 적이 있었다. 산 자락으로 찬 바람이 들어오는 데다가 연탄 보일라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서 겨울 철에 그 집은 몹시 추웠다. 워낙 춥다 보니 늘 이불을 끼고 살았고, 화장실과 식당으로 드나드는 곳만 반질 반질할 정도였다.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나서 그 다음 해 봄에 복학 신청하려고 신체 검사를 받았는데 결핵 판정을 받았다. 겨울 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영양가 있는 음식도 섭취를 하지 못하다 보니 생긴 병이다. 그때의 절망감이 아주 컸다. 지금은 모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있는 친구에게 내가 편지를 보냈는데 그 첫 구절이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책 제목을 본 따서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막장까지 추락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하지만 그 열악한 곳에서 J. 이폴리트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발생과 구조>라는 책 2권의 번역을 마쳤다. 앉은 책상 위에서 이불을 둘러 싸고 영독불 사전 3권을 찾아가면서 수작업으로 번역을 한 것이다. 지금은 돈을 싸들고 부탁을 받아도 하지 못할 일이다. 1권은 나중에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된 후배 김상환과 함께 번역을 했고, 2권은 나혼자 했다. 이 책은 40년도 더 됐지만 한국의 중견 철학자들이 필수로 읽었고, 지금도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반드시 교과서처럼 읽는 책이다. 3년 전 이 책의 재판을 찍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는데 너무 바뻐서 그냥 끌어 안고만 있다.
겨울 철에는 고생을 했지만 봄부터 가을 까지는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주변에는 완전 농촌의 자연 환경을 그대로 누릴 수 있었다. 바로 뒷편에는 도로 안 쪽으로 그 농촌 마을 보다 한 30년은 더 되어 보이는 다소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동네가 있었다. 그 안으로 산책 삼아 갈 때는 정말 시간이 거꾸로 가는 느낌을 받았다. 집 안에 서 소를 키우기도 하고, 돼지 우리도 있어 꿀꿀 거리는 돼지들도 많이 보았다. 냄새도 고약했는데 그곳 동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그곳은 구파발에서 5킬로도 안 떨어져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쌍전벽해 처럼 변했다. 내가 살던 집은 대략 위치는 추정해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런 시골 동네에서 자연환경을 벗삼아 산 것은 아이에게는 행운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 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지만, 내 딸 아이는 엄마 아빠랑 집에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뛰어 놀 수 있었다. 유치원에 가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피아노도 잘 쳤다. 피아노 선생 말로는 아이가 절대 음감을 갖고 있다고 해서 내 아이가 천재가 아닌가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초등학교를 월반 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사고만 치고 공부를 너무 안해서 내 속을 무지 썩히기도 했다. 그 때 안 것이 하나 있다. 아이는 부모 기대와 늘 정반대로 간다는 것을...청개구리 이야기가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