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기 Nov 25. 2023

서사를 내파하고 묘사를 위해 묘사하다

이민진 소설집, 장식과 무게


서사를 내파하고 묘사를 위해 묘사하다

이민진 소설집, 장식과 무게



이민진의 소설집 '장식과 무게'에서 더 이상 서사로서의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소설의 차별성을 줄거리가 주는 재미보다는 묘사를 위한 묘사에서 탐색하고 있다. 영화, 드라마, 웹툰, 웹 소설 등 스낵컬처가 주는 가벼운 재미에 중독된 독자에게 소설의 존재감은 재미로서의 서사보다는 문체가 주는 묘사의 개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작가의 시도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이모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어린 시절의 우상을 잊은 데에서 온 죄책감과 비슷했다. 이모는 내가 저버린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모를 보는 나의 시선이 변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거기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그중에는 이모보다 젊고 세련된 취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에 그랬듯 나는 다른 이들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다. 확장이 아닌 파괴와 재건의 방식으로, 기존의 것들을 버려가면서. 실종됐을 무렵 내게 이모는 명절에나 보는 사람이었다.
소설 본문 중에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줄거리를 요약하는 평소의 습관을 포기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줄거리와 주인공의 캐릭터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문체가 주는 리듬감을 따라 글을 읽다 보면 소설이 주는 재미의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리하르트 부부는 사라져 있었다. 나는 홀로 앉아 내가 있는 자리에서 부부와 차를 마셨을 이모를 상상했다. 이모의 집에 살면서 이모와 알고 지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모의 삶을 다시 사는 기분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리하르트는 2006년에 이모가 이곳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내가 리하르트의 집에서 느낀 기시감은 나의 과거가 아니라 이모의 과거에서 온 것 같았다. '현재나 미래는 없고, 지금 자꾸 반복해 일어나는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가만히 떠오르는 유진 오닐의 문장에 나는 주(註)를 달았다. 그리고 과거에 관해선 짐작만이 가능하다고.
소설 본문 중에서


이모의 실종이라는 도입부는 단지 소설의 전개를 위한 도구일 뿐 소설의 본질과는 무관해 보인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계속 묘사되지만 작가는 개의치 않고 소설의 전개를 계속해나간다. 따라올 사람만 따라오라고.


남은 것은 시간의 잔재들이다. 그것들이 페르굴라를 구성했고 태양은 그것들을 시시각각  다른 각도에서 비췄다. 주위의 구름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형태를 달리하며 특정한 모양을 갖추자마자 이내 흩어져 버렸다. "장식은 채색되었고, 채색되고 있고, 채색될 것이다." 가우디의 문장에서 시작한 서술은 어렴풋한 인상과 찰나의 단상으로 남았다. 축적된 서술과 같이 페르굴라의 장식은 겹겹이 기억을 입으며 무거워지고 있다. 제 꼬리를 먹으며 자라는 우로보로스와 같이 처음과 끝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러이 얽혀 있는 기억을 떠받치기에 아크릴 지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약해 보였다.
소설 본문 중에서


이러한 이민진 소설의 특징은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김미정 평론가는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세계를 묘사하는 소실점으로 집중하게 만드는 회화적 기법을 다음과 같이 간파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민진 소설이 일목요연하게 요약되기를 거부하는 경향과도 관련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단일한 내러티브를 거절하는 '푸르스트가 쓰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자. 단일한 화자의 내러티브 및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실점은, 세계에 어떤 대표성을 부여하여 부상시키는 대신 나머지를 후경화한다. 하지만 재현물인 이상, 시점과 소실점 자체에 내재된 폭력성은 늘 감수해야 할 조건이다.
해설 문학평론가 김미정 그러나 기어이 만난다 중에서


문학 전문가가 아니면 어쩌면 접근하기 힘들 수 있는 소설. 하지만 일반인도 작가의 소설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문체와 묘사가 주는 소설의 본질적 즐거움에 다가갈 수 있다. 그 여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약간의 용기와 인내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시디 신 인생의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