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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기 Nov 08. 2024

설국 기행

설국 기행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설국"이라는 소설로 일본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북부의 겨울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눈의 고장, 설국"은 북해도의 겨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나는 지난겨울 아내와 딸과 함께 한 북해도 여행에서 이 소설 첫 문장의 의미를 사무치게 깨닫게 되었다. 버스로 하는 여정 내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버스 차창 밖으로 내리던 하얀 눈, 눈, 눈. 

 

북해도 여행을 가게 된 건 딸아이 때문이었다. 고3 수험생활을 힘들게 마치고 수능시험을 본 후 결과를 기다리던 시간. 지친 딸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가고 싶은 곳을 물었더니 홋카이도의 눈을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겨울이라 따뜻한 오사카나 오키나와 여행을 추천했지만 딸아이는 이번에는 북해도 여행을 가자고 고집했다. 

 

처음에 집 근처 공항버스를 이용하려 했지만 공항버스 비용으로 이용 가능하다는 택시 기사의 권유로 택시를 이용하여 공항에 도착한 후 제1터미널 3층에 마련된 여행사 미팅 장소에 도착했다. 먼저 와 있던 가이드는 멀리서 첫눈에 세 명이 가족 같았다 말하여 우리를 당황케 했다. 우리 셋은 개성이 달라 사람들이 처음 볼 때 가족이라고 생각을 못 할 줄 알았는데 딱 봐도 한 가족이라니. 20년 세월 같이 산 흔적은 표정마저 같게 만드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라운지에서 오랜만에 셀카질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 예약된 아시아나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길지 않은 2시간 반의 시간이 흘러 삿포로 인근 치토세 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 수속 서류에 상륙허가라는 한자가 쓰여 있어 우리는 일본에 입국한 게 실감이 되었다. 

 

우리는 사토상이라는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투어 중 전통식당에 도착하여 일본의 우동튀김정식을 점심으로 먹게 되었다. 음식은 정갈하고 직원들이 친절하였다. 일본 음식점이 대체로 비슷하였다. 

 

점심을 먹고 여자 가이드는 사토 상의 근무시간 때문에 당초 첫날 일정 중 과자점 방문과 광고로 유명한 자작나무길 일정은 2일 차로 순연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운전기사의 피로도를 엄격히 관리한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과로 때문에 사고를 내고 죽은 운전기사가 나오는 영화 "비밀"이 생각났다. 

 

겨울 스키를 타기 위하여 버스를 타고 있던 모녀의 모습과 졸음에 힘겨워하며 운전하던 기사.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과로를 할 수밖에 없던 기사의 상황이 엄마의 뇌리에 각인되며 그를 동정하게 된 그녀. 사고 후 영혼이 뒤바뀐 모녀의 육체. 그런 장면이 생각나며 안전운전을 위해 여행 일정을 조정하는 여유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우리는 남은 일정 중 일본 연인들의 성지인 행복 역으로 버스투어를 계속하였다.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캔 사이다를 사 먹고 남은 동전으로 캔커피를 사서 운전기사인 사토상에게 건네주니 너무나 고마워하였다. 

 

행복 역은 조그마한 역사 건물로 연인들의 사진과 약속을 적은 메모지들이 빽빽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 남산타워의 열쇠와 자물쇠 고리가 생각이 났다. 연인들의 약속과 행복을 기원하는 장소적 공통점에서 연상이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12월 초 북해도의 추위가 오래 실외에 머무는 것을 방해할 정도로 살을 에는 듯해서 빨리 버스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한국에선 느낄 수 없는 냉기가 북해도의 추위를 선명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초겨울의 해는 짧았다. 우리는 약속대로 사토 상의 퇴근시간을 지켜주기 위해 첫날밤을 보낼 도카치가와의 사사이 호텔로 향했다. 이 호텔은 100년이 넘은 호텔로 일본 전통의 다다미방과 온천을 할 수 있는 료칸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온천에서 목욕을 하면 피부가 좋아져 모두 미인이 된다는 미인탕의 전설이 있을 만큼 온천물은 참기름처럼 맨들맨들하였다. 

 

우리는 호텔 앞의 세이코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였다. 물건을 구입하면서 일본어를 조금 하는 딸아이가 점원에게 물어보았지만 의사소통이 잘 안 되자 옆에 있던 남자분이 우리에게 물어가며 일본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궁금하여 물어보니 일본에 2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서울에 살다가 최근에 평택으로 이사를 했는데 친구 부부와 자기 부부 4명이 같이 여행을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부부여행을 같이 할 정도로 친한 친구가 있는 모습에 부럽다고 말했다. 세계여행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부부의 모습이 정말 금실이 좋아 보였다. 

 

액체 형태의 화장품은 기내 반입이 되지 않아 공항에 맡기고 와서 호텔 매점에서 스킨과 로션을 구입하려 했더니 용어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요리조리 상품을 둘러보니 화장수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물품이 있어 구입하였다. 호텔 뷔페에서 온천욕장에서 입을 유카타를 드레스코드로 하여 모두 그 옷을 입고 식사를 하였다. 아까 편의점에서 만난 두 부부와 모녀 여행객, 동호회에서 남자들끼리 단체로 온 여행객, 부부끼리만 온 여행객 등 다양한 형태의 여행객들이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뷔페에만 오면 소화가 안 되는 징크스가 있어 식사를 많이 하지는 못하였다. 대신 아내와 딸이 푸짐하게 먹는 모습을 부러워하며 바라보았다. 

 

저녁을 먹고 본격적으로 온천을 하였다. 실내뿐만 아니라 야외에도 온천탕이 있었는데 근처 직장인들끼리 스키를 타고 온천을 하러 온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젊은이들답게 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노인들이 많이 보였다. 노령화된 일본의 모습에 한국의 미래가 그려졌다. 또 나와 아내의 퇴직 후 삶의 모습도. 오늘처럼 평온하고 건강하게 가족들과 여행하며 늙어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일본에서 첫날밤을 온천의 열기 속에서 보내게 된다. 

 

오비히로 2대 과자점 중 하나인 류게츠스위트피아에서 시식과 함께 지인들에게 선물할 커스터드 롤케이크를 구입하는 것으로 둘째 날 여정을 시작했다. 광고의 명소인 자작나무 길을 보자 우리는 남이섬과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이 떠올랐다. 광고 촬영의 명소답게 여자 가이드분이 포인트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었다. 우리는 고마움에 가이드에게 음료수를 주며 사진 찍어주는 것을 부탁하였다. 

 

자작나무 길을 산책하고 버스는 후라노로 향했다. 이윽고 이쿠타라 역에 도착하자 곳곳에 영화 "철도원"의 장면을 기억나게 하는 소품들이 있었다. 영화 "비밀"에서도 주연을 맡았던 히로스에 료코가 죽은 딸의 성인 역으로 등장하여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던 영화. 평생 철도원이라는 천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았던 주인공역(일본의 국민배우 타카구라 켄 분) 남자를 욕하면서도 동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영화 속 장면처럼 눈 내리는 이토쿠라 역에서 우리 가족은 추억을 남기기 위하여 많은 사진을 찍었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카레 정식집에 도착하여 오므카레정식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간 곳은 요정들이 살고 있는 집처럼 예쁘다는 닝구르테라스. 주차장에 도착하여 일렬로 주차된 사각형 경차들의 대열을 보자 일본인들의 검소함이 구석구석 세워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신 관광객들에게 주의를 요청하며 눈을 치우고 있던 노인의 모습에서 직업정신에 투철했던 영화 속 철도원의 정신을 보기도 했다. 눈으로 가득한 요정들의 집에서 추억의 사진을 찍고 우리는 아오이 이케, 푸른 연못으로 향했다. 

 

자작나무가 푸른 물속에 잠겨있는 아이폰 배경화면으로 유명한 푸른 연못(알루미늄 성분 때문에 물빛이 푸르다고 함). 겨울이라 쌓여있는 눈 속에 푸른 물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겨울에도 얼지 않는 흰 수염폭포는 그 아쉬움을 사라지게 할 정도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소운쿄(대협곡)를 지나 로비에서 모닥불이 반겨주는 소운가쿠 호텔에 두 번째 밤을 보내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 창밖으로 가이드가 무언가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일제히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복슬복슬한 밤색 털을 자랑하는 여우 한 마리가 우리 버스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가이드는 자기도 올해 여우는 처음 본다며 일본 가이드인 자기도 자주 못 보는 여우를 관광객들이 모두 본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고 말하며 모두에게 행운의 선물이 올 것이라고 장담하는 모습에 우리는 기분이 고취되었다. 

 

호텔 뷔페에서 회요리를 위주로 석식을 하고 온천을 하며 둘째 날의 피로를 날려버린 우리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위하여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일어나서 호텔 조식 뷔페를 먹고 소운쿄에 있는 유성폭포와 은하폭포를 보러 갔다. 아침을 먹고 속이 안 좋았던 나는 사이다를 마셔 계속 트림이 나왔는데 옆에 모녀 여행객이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본 여행 기간 중 날씨도 제일 추워 폭포를 오래 보지 못하고 버스로 돌아올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았다. 

 

그러나 점심을 먹기 위하여 홋카이도 규카츠 정식집에 도착하여 약불에 돈가스를 맛있게 데워먹을 정도로 오후에는 몸이 회복되어 다행이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오타루 운하로 향했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주인공역 후지이 이츠키(여배우 나카야마 미호 분)가 편지를 부치던 우체통에서 사진을 찍고 영화 속 장면을 추억하였다. 눈이 내리는 오타루 거리는 영화 속 명대사 "오겡끼데스카"를 연발할 정도로 멋진 풍경을 선사하였다. 오타루에서는 오르골 전시장과 유리공예 전시장이 있어 일 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전시장을 구경하고 가이드가 안내하는 근처 쇼핑몰에서 가족들에게 선물할 마유 크림을 구입했다. 우리나라 제주도처럼 북해도의 말도 유명한 데 마유 크림은 각질 제거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추운 날씨 탓에 북해도의 주민들도 겨울철 발이 많이 트는데 마유 크림을 바르면 효과가 좋다고 하여 구입했다. 지인들에게 선물하였는 데 사용 후 정말 효과가 있다고 모두 좋아하였다. 

 

호텔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삿포로 도심에 도착하였다. 오도리공원에 있는 시계탑은 서울역의 시계탑처럼 만인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동안 북해도 여행이 우리나라 강원도 느낌의 오지 여행이었다면 삿포로에서 비로소 일본의 도시를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빛 축제인 화이트 일루미네이션 축제와 야시장의 먹거리, 모두 도시의 냄새였다. 인사동에 있는 회오리 감자 같은 모양의 감자튀김도. 전차가 다니는 모습에 레트로의 감성까지. 우리는 모두 이국 도시의 정취에 푹 빠져들었다. 

 

업된 마음으로 도착한 게 요리 전문점에서 호텔뷔페에서와는 달리 무수한 게와 해물을 식탁 위에 가득 쌓아놓고 먹는 우리 가족의 모습에 평택의 두 부부는 체구는 작으신 분들이 식성은 대단히 좋다고 말하며 우리를 휘둥그레 쳐다보았다. 

 

저녁을 먹고 삿포로 도큐레이 호텔에 도착하였다. 그동안의 호텔과는 달리 도심의 현대식 호텔로 익숙한 모습에 편안함을 느끼고 텔레비전도 보았다. 우리는 창밖으로 전차의 모습을 보고 방안에만 있기 아까워 삿포로의 겨울 거리를 구경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섰다. 

 

패밀리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였고 돈키호테 마트에서 할인점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선물 등을 구입하였다. 딸아이는 서울의 명동 같이 젊음이 넘치는 삿포로 거리에서 인형 뽑기를 하며 추억을 만들고 우리는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행복해했다. 

 

거리에서 우연히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왔다는 모녀의 모습을 마주쳤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하며 딸아이와 우리 부부도 미래에도 함께 여행할 상상으로 마음이 즐거워졌다. 단체로 동호회에서 온 아저씨들은 삿포로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평택의 두 부부도 호프집에서 일본식 맥주를 즐기며 우리 보고 같이 먹자고 신호를 보냈지만 사양하고 삿포로 거리에서 북해도 마지막 추억을 만들어 나갔다. 

 

다음날 호텔 조식 후 가이드의 안내로 일본의 발전된 노인의학에 대한 정보를 들었고 면세점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직장동료들에게 선물할 마유 립스틱을 마지막으로 구입하였다. 치토세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각자 해산한 관광객들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귀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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