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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기 Nov 22. 2024

황도의 추억

황도의 추억

 

지난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너른 평원 위에서 활짝 웃고 계신 아버지 꿈을. 그 꿈을 꾼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낙상사고를 당하시고 노인요양병원에서 가료 중이셨죠.

 

사고는 있었지만 의사도 심각하지 않다고 말하고 아버지의 안색도 밝으셔서 불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회사 업무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행가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더군요. 요양병원에서 먼저 연락을 받은 누나의 호출로 3형제는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집중치료실에서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 한 명 한 명씩 마지막 인사를 다 들으시면서 온몸으로 이별의 슬픔을 느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인사가 끝난 후 더도 덜도 없이 이제 할 일을 다 마치셨다는 듯 유명을 달리하시더군요.

 

차가운 겨울 땅에 아버지를 묻고 돌아오는 길 장례버스 창밖으로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며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려 봅니다. 황도의 추억. 노랗게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정갈하게 둘로 잘라 설탕물과 같이 담아 만든 복숭아 통조림.

 

어릴 때 몸이 약했던 나는 겨울이면 자주 감기에 걸리고 몸살에 힘들어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허약한 셋째를 위해 누런 종이봉투에 복숭아 통조림을 담아 귀가하곤 하셨죠.

 

나는 그 황도를 숟가락으로 으깨 먹으며 달달한 아버지의 사랑을 설탕에 절여진 복숭아로 체감하였던 것 같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단칸방에 4남매가 같이 살던 시절. 방이 비좁아 밤마다 다락에 혼자 올라가 잠들곤 했었습니다. 언뜻 잠이 들었다가 악몽이라도 꿀라치면 나는 의식 없는 잠결에도 미끄러지듯 아버지가 잠자고 있는 방으로 내려와 굵고 강인한 아버지의 팔뚝을 어루만지며 무서움을 달래곤 했었죠.

 

자신의 곁에서 무서움에 떨던 어린 아들을 무심하게 끌어안으며 다시 잠을 청하도록 해 주셨던 아버지.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강인하고 굵은 팔뚝만큼이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지만 그 나무는 오래가지 않아 헐벗은 겨울나무가 되고 말더군요.

 

잘 다니던 직장을 관두시고 시작한 사업이 연이어 실패하면서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무능력함을 숨기기 위해 가족들에게 화를 풀기도 했고 다른 사람과의 잦은 다툼으로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도 하셨죠.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원망하며 나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마저도 할 수 없음에 불효자는 눈물만 흘리게 되어버린 것이죠.

 

과연 나는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로 기억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음을 그때는 왜 몰라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노력을 하며 가정을 지켜내려 했으나 남은 건 아내와 자식들의 원망뿐. 상황이 그랬고 시대가 그랬음을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이제야 지난날 당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발인 날 딸아이가 원하던 사관학교 합격자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쁜 손녀를 자주 보고 싶어 하셨지만 고3 수험생이란 이유로 자주 내려가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컸던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딸아이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임종을 같이 하며 미안함을 달랬고 그런 손녀에게 할아버지는 대학합격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어릴 적 셋째 아들에게 복숭아 통조림을 선물하듯 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아버지의 말년이 외롭지만은 않았기를 바라봅니다. 20년 전 딸아이가 태어나고 돌도 지나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혼자 시골에서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걱정하는 마음이 덜 했는데 혼자되시고 보니 항상 마음이 쓰였습니다.

 

아내도 걱정을 많이 해서 우리는 그전보다 자주 시골을 왕래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말에 시골에 가서 장도 보고 식사도 같이 하는 시간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린 시절 아버지를 원망하였던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어머니도 없는 마음에 아버지라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들을 많이 챙겨드렸지요. 딸아이가 돌을 지나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우리가족과 아버지와의 동행은 무탈하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언젠가부터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못 본 척하는 것도 한계에 도달할 즈음 아버지가 침대에서 낙상을 하시고 급격히 몸이 쇠약해지신 듯 거동이 불편해지셨지요. 결국 요양병원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다가오고야 말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우리 부부는 딸아이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세대는 어찌 되었든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 어려움을 나눠 극복했지만 혼자 남겨질 딸은 어떻게 이별을 견뎌낼까 하는.

 

참, 이런 와중에도 부모보다는 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지만 우리 부모님들도 그랬으리라 짐작하니 아버지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본인이 원하던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많은 동기, 선후배들과 함께 청춘의 뜨거운 시간을 보내며 가족 같은 사랑을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평생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 그들과의 유대관계로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더없이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낍니다.

 

혈연으로 맺어졌지만 서로를 원망하며 도움만 바라는 가족들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위로도 해보게 되더군요.

 

아버지의 첫 기일에는 사관생도 제복을 입은 늠름한 딸과 함께 노란 복숭아 통조림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이승에서는 몸도 마음도 힘드셨을 텐데 그곳에서는 드시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마음껏 누리시길 바라봅니다.

 

유난히 좋아하셨던 나훈아의 ‘홍시’를 들으며 아버지를 추억하겠습니다. 어린 시절 황도 복숭아 통조림은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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