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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Oct 16. 2023

그대가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아침 공기에 호박잎들이 조금씩 누런 빛으로 말라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뜨거웠던 여름이 가버리남은 볼품없는 모습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돌아올 봄을 위한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썩어가는 잎들조차 겨우내 굳어버린 흙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겠지요. 봉선화 씨앗이 떨어지고, 봉선화 잎들은 그 자리를 덮어주며, 데워줄 것입니다. 속이 문드러지는 계절이 속수무책으로 다가와도 그 또한 꽃을 피우는 계절을 위한 것임을 이젠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해 여름의 그대는 봉선화 빛으로 물들어 눈이 부셨기에 저는 차마 그대를 바로 볼 수가 없었지요.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그대는 모르는 듯 하였기에 저는 참으로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Y. 그대의 꽃을 피워낼 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그대의 우편함에 그대를 닮은 봉선화 씨앗을 걸어두겠습니다.


가을대낮은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난폭한 겨울의 권위가 조만간 세상을 덮을테지요. 가을은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이어질 봄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여린 새순이 어여쁜 얼굴로 중력을 거스르봄은 평화롭게 다가오지만은 않습니다. 가을에 흙으로 추락한 씨앗들이 다시 꿈을 꾸며, 몸을 비틀고, 찢고서 솟아 올라야 하지요. 씨앗 하나가 꽃이 되기 위해 하늘과 바람땅과 물이, 이 모든 우주가 달려온다는 걸, 그대는 아시나요. Y. 그대는 저와 소주잔기울이며, 취기가 오를 때면,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냐며 슬픈 눈을 하시하였지요. 그럴때면 그대의 눈을 피하며 저는 우물쭈물 대답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요. 삶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흙을 딛고서 걸어오던 지난 몇 년간의 세월을 뒤돌아 보면, 저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행복했고 말구요. 저를 고통의 폭풍으로 몰아 넣은 건, 저의 집착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지요. 부와 명예에 대한 집착, 아이들 교육에 대한 집착, 행복해 보이는 가정에 대한 집착, 타인과 비교하려는 집착. 노력을 넘어서고, 소망을 덮어버린 욕망의 자리에는 집착이 자라났고, 그것들은 고통과 상실을 잉태하더군요. 여전히 저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일 뿐이지만, 자연의 품에서 글을 쓰고 요리를 배우며, 조금씩 삶을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 


몇해 전 겨울의 대낮은 어마어마한 상실을 뱉어내었고,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저의 어깨에 놓인 거대한 납덩어리들은 나약한 를 짓눌렀고, 의 머리는 땅에 질질 끌려다녔지요. 중력보다도 무거웠던 상실들을 감내하고 있는 저의 존재가 처연하였고, 의 어깨에 납덩어리를 얹어 원망했었지요. 연약한 대낮은 쓰라렸고, 짙었던 한밤은 서글펐습니다. 참으로 서글펐지요. 길을 잃고 헤매이던, 그 시절의 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며, 부모님과 함께 따고 말렸다는 곶감을 전해주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에겐 별것 아닌 선의였을지 모르겠지만, 꽁꽁 어붙은 그 시절의 에겐 납덩어리를 녹여내고, 검은 심장에 푸드득 거리는 날개 하나를 삐죽히 솟아나게 하였지요. 늦은 밤 책을 읽으며, 허전할 때 먹었곶감을 생각합니다. 삶은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페르난도 페소아', '사물들의 경이로운 진실' 중. -


겨울이 있기에 봄은 사무치도록 찬란합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고, 상실이 있기에 성취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두려움은 더이상 두렵지가 않지요. 그대가 있기에 세상은 완전할 수 있었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행입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슬퍼하는 그대를 위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고작 볼품없는 밥상 하나 차려드리는 일 밖에는 없겠지만, 초라한 밥상 하나에 수줍게 마음 하나 얹어드립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힘이 들면, 잠시 다녀가세요.

그대를 위해 저는, 밥을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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