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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버프 Mar 18. 2024

메이 디셈버 | 거울 혹은 카메라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는 최근 본 어떠한 영화보다도 나를 매혹시켰다. 산란하는 부드러운 빛이 내려앉은 초록 수풀의 이미지와 천둥처럼 내려치는 강렬한 피아노 선율이 충돌하는 첫 쇼트부터 영화는 예상할 수 없는 긴장감으로 관객을 휘어잡는다. 스캔들 속의 진실을 찾으려는 배우의 여정에 갑작스럽게 음악을 끼얹는가 하면 인물의 얼굴은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어 이야기의 믿을 만한 구석을 내어주지 않는다. 사건을 파헤치는 관객이라는 형사의 동료이던 주인공은 이내 다른 것으로 변신하며 우리를 미스터리 속으로 빠뜨려 버린다. 이때 우리는 인물을 거울을 통해 자주 마주하게 되는데 거울을 볼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듯한 그녀의 얼굴이 우리를 낯설게 사로잡는다.

 카메라와 거울은 흥미로운 조합이다. 빛을 반사해 눈이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과 눈의 대체제로 보고 있는 것을 담아내는 카메라가 만나면 이미지의 충돌이 생긴다. 영화 속에 거울이 들어가면 거울은 카메라를 드러내지 않는다. 흔히 거울을 통해 인물이 자신을 보는 쇼트는 그 광경을 찍고 있는 카메라의 존재를 숨김으로써 허구의 신뢰성을 지킨다. 반면 허구의 신뢰성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며 거울과 카메라를 모두 이야기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영화도 있다. 내가 이것을 처음 느낀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거울’이었다. 인물이 거울을 통해 카메라를 직접 들여다보는 쇼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거울’은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물의 시점을 거울 안 거울상에게 부여한다. 이렇게 전이된 시선은 카메라의 렌즈와 직접 마주하며 관객은 인물을 들여다보며 반사된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는, 마술적 착시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거울을 카메라와 대화하게 만든 것이다.


 ‘메이 디셈버’에서 토드 헤인즈가 낸 묘안은 이것의 반대인 거울과 카메라의 융합이다. ‘거울’에서 마주 보던 카메라는 ‘메이 디셈버’ 속에서 거울 뒤로 숨는다. 그렇게 거울은 배우들을 밝게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이자 무대가 된다. 이때 배우라 하면 카메라 앞에 신체를 둔 나탈리 포트만과 줄리언 무어이면서 거울 앞에 서있는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이다. 줄리안 무어는 카메라가 돌아가면 자신을 모방해야 나탈리 포트만을 위해 특유의 혀 짧은 목소리를 캐릭터에 가미했다고 한다. 그리고 짧은 제작 기간 탓에 나탈리 포트만은 리허설 없이 엘리자베스로서 그레이시를 모방하면서 줄리안 무어를 모방했다고 한다. 그 결과 관객은 거울 앞에 선 엘리자베스를 통해 카메라 앞에 선 나탈리 포트만이라는 예술가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캐릭터의 겹을 걸러 본체에 다가가게 해주는 체가 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거울, 카메라, 연기라는 겹겹의 층위인 것이다.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 이 이야기의 기본 전제는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말장난이지만 또한 기저의 본질을 드러내는 틀이다.  

 거울은 상대를 확인하고 동시에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다. 이때 확인이란 자신의 연기 또는 가면의 안부를 점검하는 행위이다.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가 동시에 거울 앞에 서있을 때 그레이시는 그녀 얼굴 위에 얹힌 메이크업이라는 가면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레이시의 가면을 힐끗 보며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맞추는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메이크업과 매너리즘을 흡수하며 자신의 얼굴에 얹힐 가면을 세공한다.


 엘리자베스는 마치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낯선 마을에 온 형사처럼 보인다. 도덕적 회색 지대를 뒤지는 형사가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인터뷰하고 목격자들의 진술을 획득하며 수집한 단서들이 수렴하는 공간은 거울이다.  하지만 이 형사는 독특하게도 수사 대상이 되고 싶은 형사다. 그래서 거울은 범죄자를 수사하며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는, 수사 대상의 가면을 써보는 무대이다. 타블로이드 잡지의 이미지부터 특유의 목소리까지 수집된 단서들은 거울 앞에서 20년 전 그 용의자와 같은 나이의 몸을 갖고 살아난다. 수사의 절정은 조와의 섹스다. 유사동생이 되어 20년 전의 그레이시와 같은 나이에 유사근친에 가담한 엘리자베스는 20년 전 조와의 스캔들 속 그레이시를 완성한다.

 나탈리 포트만의 독백 연기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만큼 엘리자베스를 매혹시킨다. 그 매혹은 거울과 카메라의 경계를 지운다. 짙은 고동색의 배경이 거울에 비친 방의 벽지인지 카메라 테스트를 위한 스크린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아니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연기의 기운이 화면의 경계를 넘어 흐른다는 것이다. 렌즈를 혹은 자기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어른들이 하는 짓’으로 빚어낸 결과물을 뽐낸다. 20년 전에 쓰인 편지에 담긴 그레이시의 사랑, 두려움, 자신감은 마침내 포식에 성공한 짐승의 기교스러운 포효로 되살아난다. 가면을 완성한 자가 거칠게 내뿜는 날숨에는 대본의 텍스트를 인간의 물성으로 승화하는 데 성공한 연기 예술가의 안도와 성취감이 섞여 있다. 그리고 어느새 거울은 그레이시를 따라가며 모방하기 위한 것에서 실시간으로 발현되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 모방을 위한 거울은 예술을 위한 카메라로 진화한다.

하지만 이 매혹은 타블로이드 잡지의 스캔들이 하루만 지나도 잊히듯이 순식간에 휘발된다. 관통을 거부하는 그레이시의 튼튼한(secure) 가면 때문이다. 그레이시라는 모방 대상, 실험체가 뒤집어 깐 가면에 엘리자베스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카메라 앞에 던져진다. 슛이 돌아가면 그녀는 더 이상 거울을 장악하지 못하고 카메라에 갇혀버린다. 주인공의 운명을 애도하지 않는 영화는 우리에게 혼란을 남긴다. 스캔들 속 진실에 매혹된 것인지, 진실을 가리는 스캔들에 매혹된 것인지. 섹스신 내 쾌락의 실체처럼 모호해져 버린 엘리자베스의 진실 찾기 놀이, 연기에 내리는 유죄 선고처럼 마지막 천둥 같은 피아노가 내리친다. 홀려버린 우리도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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