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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HY Apr 19. 2022

이번 여행은 망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벚꽃 없는 벚꽃 여행

 언니와 경주 여행을 다녀왔다. 벚꽃을 보기 위해 간 여행이었지만 경주에 도착해보니 벚꽃이 이미 다 떨어져 있었다. 꽃잎이 떨어진 직후의 벚꽃나무는 참 볼품없고 지저분해 보였다. 벚꽃은 우리 집 앞에도 있는데 난 이런 걸 보겠다고 먼 경주까지 온 건가. 우리처럼 벚꽃을 보러 경주에 온 것 같은 여행객들이 그래도 아직 꽃잎이 남아있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려 줄을 서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짠하면서도 웃겼다. 우리는 고작 저런 벚꽃 사진을 찍겠다고 줄을 설 순 없다는 괜한 오기심이 생겨 사진을 찍지 않았다. 벚꽃이 아니더라도 분명 경주의 풍경은 아름다웠는데 그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경주 곳곳에 있는 벚꽃나무를 볼 때마다 '아~ 벚꽃이 만개했을 때 왔으면 얼마나 예뻤을까? 저번 주에 여행 올 걸. 우리는 운도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해서 거대한 능의 웅장함도 한옥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뙤약볕 아래 뚜벅이 여행

 경주는 정말이지 너무나 더웠다. 일기예보에서 낮에 28도까지 올라간다는 걸 보고 최대한 얇은 옷을 입고 양산을 챙겨 왔지만 그걸로 택도 없을 만큼 너무나 더웠다. 4월인데 날씨는 한여름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차도 빌리지 않아 걸어 다녀야 했다. 지도 상으로 볼 때 이 정도는 걸어 다니면서 구경할 수 있겠지 했던 곳들이 뙤약볕 아래에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나는 날씨에 뚜벅이 여행은 극기훈련이 되었다. 걸어서 30분 거리인 관광지에 가려고 택시를 호출해봤지만 단 한 대도 잡히지 않았다. '택시 타면 되지 뭐'라고 생각했던 안일한 과거의 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여행은 날씨가 반이라는데 우리 자매는 어찌 이리도 날씨 운이 나쁠까. 여행을 갈 때면 비가 오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덥다.


 엉망진창인 여행 속 즐거운 순간

 더위를 피해 숙소 입실 시간이 되자마자 숙소로 들어갔다. 여행을 계획할 때, 밖에서 오래 놀고 숙소에서는 잠만 잘 생각으로 숙소를 정말 대충 골랐다. 싱글 침대 2개가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방이 우리 숙소였다. 그래도 다행히 숙소 안은 시원했고 우리는 지친 몸을 눕힐 수 있는 침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침대에 누운 채 한참 동안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별 것도 아닌 걸로 눈물이 날만큼 웃고 쉴 틈이 없을 만큼 떠들었다. 이야기 주제 중에는 '뭐하러 경주에 왔는가'도 있었다. 이렇게 방 안에서 수다 떠는 게 제일 재밌는데 그냥 집이나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나면 될 것을, 경주까지 올 필요는 없지 않았나 이야기했다.

 한참을 떠들다가 그래도 경주까지 왔는데 방 안에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더위는 한풀 꺾여 있었고 우리는 첨성대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구경을 하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팠다. 원래 첨성대에서 동궁과 월지로 가서 야경을 보려고 했는데 배가 고파서 저녁을 먹고 동궁과 월지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미리 알아봐 둔 소곱창 집에 갔다. 경주에 있는 맛집은 어디서나 다 만석이어서 기다려야 했다.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동안 소곱창 냄새가 콧속을 후비고 들어와 점점 더 배가 고파졌다.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모듬 곱창과 소주, 맥주를 시켰다. 곱창이 나오기 전 소주와 맥주를 먼저 줘서 언니가 소맥 한 잔을 말아줬다.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달다! 너무 맛있다!! 오늘의 모든 피로를 다 날려주는 맛이었다. 나는 이 맛을 보기 위해 경주에 온 거였다. 곧이어 모듬 곱창이 나왔고 곱창과 함께 먹는 소맥은 환상적이었다. 동궁과 월지 야경을 보려면 빨리 먹고 가야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볶음밥에 전골까지 먹다가 결국 동궁과 월지 폐장 시간이 지나버렸다.

동궁과 월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소곱창! 그리고 소맥

 이번 여행은 망했다.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벚꽃을 보러 갔지만 벚꽃이 없었다. 동궁과 월지 야경이 제일 보고 싶다고 했던 언니는 소곱창 때문에 동궁과 월지 야경을 못 봤다. 망한 여행이었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때 기억나? 엄청 더웠잖아. 경주까지 가서 수다만 떨었잖아. 소곱창 먹느라 야경도 못 봤잖아.

리는 우리의 망한 여행을 추억하며 그렇게 또 한바탕 수다를 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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