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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Dec 15. 2023

'알'고보면 '쓸'모있는 '서'울의 봄 '잡'지식

영화 서울의봄. 알고 보면 더 깊어지는 영화. 


12·12 군사반란을 극화한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관객수 천만을 향해 순항 중이다. ‘심박수 챌린지’와 같은 유행이 번지거나, 극 중 전두광(전두환)을 연기한 배우 황정민의 다른 작품들도 덩달아 호응을 얻는 등 사회 문화 현상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서울의 봄’은 영화다. 자연히 12·12 군사반란이라는 역사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또 영화에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해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최규하 대통령 등 실존 인물이 이름을 바꿔 출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사실을 극화한 만큼 12·12 군사반란 전후, 좌우에 있는 실제 역사를 알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영화에 나오지 않거나 배경 설명이 필요한 몇가지 역사적 일화들을 간추려 소개한다. 


◆12·12 알려면 ‘윤필용 사건’부터 

 영화에서 전두광과 노태건(노태우)는 자신을 따르는 선·후배 군인(신군부)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군대에서 공적 명령체계를 무시하고 사적 친분을 이용해 무력을 동원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이들이 이끌었던 사조직 ‘하나회’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취임 직후 대대적으로 하나회를 정리하면서 하나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전두환은 어떻게 하나회를 군내에서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나회는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운영됐다. 이러다보니 비하나회 군인들은 물론, 하나회 내부 회원들도 누가 하나회 출신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화에서 전두광이 홀로 하나회 후배를 만나 가입을 확정짓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하나회의 비밀성을 보여주는 장치다. 

 박정희 대통령도 하나회에 있어 빼놓을 수 없다. 영화에서는 전두광이 반란을 망설이는 노태건을 설득하며 육사생도 행진을 언급하고 그 후부터는 자신은 박 대통령에 충성했다고 말한다. 이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전두환이 벌인 육사생도 행진사건 및 이후 박 대통령의 전두환 총애를 의미한다. 전두환은 5·16 군사정변 후에도 사회전반에 5.16에 대한 지지가 미지근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거리에서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행진퍼레이드를 벌인다. 이 일로 전두환은 박정희로부터 총애를 받게된다. 전두환은 육사 동기들 중 가장 먼저 ‘별’(준장)을 달았으며, 그가 거쳐간 보직은 군 내 엘리트 군인들이 보임받는 이른바 ‘알짜 보직’들이었다. 10.26사건이 일어나기 7개월전인 1979년 3월, 박정희는 전두환을 당시 군내 최요직 중 하나인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군부 내 자신의 충성 세력으로 두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회의 존재를 몰랐을리 없으며 심지어 박정희가 하나회를 군내 비밀 사조직으로 썼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물적 증거는 없지만 박정희가 하나회를 묵시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비호했다는 정황은 1973년 윤필용 사건을 통해 알 수있다. 

 박정희의 최측근이자 충성경재쟁을 하던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1973년 4월 숙청당한 사건이다. 윤필용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과의 술자리에서 후계로 이후락을 거론 한 것이 박정희의 귀에 들어간 뒤 벌어졌다. 격노한 박정희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지시, 윤필용은 구속된다. 

 그런데 강창성은 수사과정에서 하나회의 실체는 물론 후원자 중 한 명이 윤필용인 사실을 알게된다. 강창성은 하나회 창설멤버이자 윤필용의 참모장이었던 손영길을 비롯한 다수의 하나회 장교들을 윤필용 사건을 고리로 수사 뒤 예편시켰다. 정작 전두환과 노태우는 숙청대상에서 제외된다.

 강창성은 후일 자신이 쓴 ‘일본, 한국 군벌정치’ 책에서 “윤필용 장군 사건과 함께 착수됐던 하나회 사건 수사는 하나회의 실질적인 후원자였던 박 대통령의 무언의 압력으로 불완전한 선에서 매듭지어지게 됐다”며 “윤 장군 사건에서 전두환이 살아남은 것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건재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보면 실제 역사나 영화에서 어떻게 하나회가 진압군인 육군본부보다 더 조직적이고 주도면밀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베트남에 있었던 전두환과 김오랑

 1969년 육사 동기(11기) 중 가장 먼저 대령을 달았던 전두환은 이후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백마부대) 제29보병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연대장 이상 장교들은 큰 문제가 없으면 귀국한 후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전두환도 이 훈장을 받았는데, 강창성은 책에서 이 과정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전두환의 상관이었던 조천성 9사단장과 주월 한국군 사령관 이세호가 훈장 수여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강창성은 책에서 전두환에 대한 훈장 반대 사유에 대해 “지휘능력의 결함은 물론이고 전공도 적었지만 연대장 부임 후부터 너무 빈번하게 파티를 벌인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는 후문이다”라고 썼다. 또 연대장 재직시절 고위장성과 민간인 등 외부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와 이들을 응대하느라 작전지휘권을 종종 참모진에 위임했다는 9사단 참모의 증언을 소개했고, “가뭄이 극심해서 장병들은 식수난을 겪고 있는데 자신(전두환)은 식수로 샤워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타임지가 이것이 사실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고 기록했다. 전두환은 이후 1974년에 준장으로 진급한다. 

 그런데 전두환이 베트남에 있던 이 시기에 같이 있다가 12·12 군사반란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다가 반란군의 총격에 맞아 순직한 김오랑 소령(이후 중령 추서)이다. 영화에서는 정해인이 오진호 소령이라는 이름으로 연기한다. 김오랑은 중위시절이던 1970년 7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김오랑은 맹호부대, 전두환은 백마부대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베트남에서 안면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육사 11기와 갑종. 전두환과 장태완

 영화 서울의 봄에서 하나회와 대립하는 군인으로 나오는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 김준엽 육군본부 현병감, 공수혁 특전사령관 중 이태신과 김준엽의 모태가 되는 장태완 수방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은 갑종, 즉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이다. 영화에선 전두광과 노태건의 대사를 빌려 갑종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갑종은 육군 초창기 초급 장교 양성을 위해 실시한 제도로 1950년부터 1969년까지 운영됐다. 약 6개월동안 교육을 거쳐 초급 장교를 양성했기 때문에 기수가 많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초급장교로 전선에서 싸운 장교 중 다수가 갑종 출신이다. 장태완은 1950년 6.25 전쟁 이후 임관해 갑종 11기이며 김진기는 육사 9기이자 갑종 6기 이기도 하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갑종 출신 장교들이 많았고, 장성도 자주 배출했다. 

 이와 달리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사 11기 출신이다. 1948년 개교한 육군사관학교에서 현재와 같은 4년제 졸업 제도가 처음 적용된 것이 육사 11기부터다. 이 육사 11기는 그 이전 기수와 달리 4년제 교육을 받은 정규 사관생도 첫 기수라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를 ‘육사 1기’로 칭하기도 했다. 


◆‘전두환 유죄’ 근거가 된 최규하의 ‘사후결재’

 반란에 성공한 전두환 등은 1979년 12월13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것에 승인하는 사인을 받아낸다. 영화에서 표현된 장면에서 최한규(최규하) 대통령은 이 사인을 하다가 결재 서류 밑에 사인 시각을 기재했다. 이 결제가 정승화 총장 체포 뒤 이뤄진 ‘사후결재’임을 증거로 남긴 셈이다. 극 중 대사에서도 사후결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실제로 최규하의 이 행동은 김영삼정부 시절 이뤄진 전두환·노태우 구속 및 재판 과정에서 법원의 중요한 판결 근거로 사용된다. 현장에 있었던 신현확 총리가 공판과정에서 최규하의 이러한 행적을 증언했는데 1996년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에 각각 무기징역 및 징역 17년의 유죄를 판결하면서 이를 주요 증거로 인용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전두환이 12월12일 6시20분 경 국무총리 공관에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에 대한 체포 재가를 요청하였을 때 대통령이 묵시적으로라도 이를 승낙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없고, 오히려 이를 거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며 “대통령이 12월13일 새벽 5시10분 경 정 총장의 체포를 재가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정 총장이 체포되고 반란을 저지 또는 진압하려는 장성들이 제압된 후에 이뤄진 것으로 이는 사후 승낙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적시했다. 결국, 최규하가 남긴 사후결재가 17년 뒤 신군부 반란행위 심판의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던 것이다.




추가 TMI 들. 


1. 하나회의 선두주자는 사실 손영길이었다. 손영길은 5.16 이전 박정희의 참모장을 지냈고, 울산 출신으로 박정희와 친분이 깊었다. 윤필용 사건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그라고 봐야한다. 손영길이 윤필용 사건으로 군복을 벗게되면서 하나회의 수장자리는 전두환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문에 윤필용 사건의 제보자가 전두환이라는 썰도 있긴 했지만 그건 야사의 영역이니..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강창성의 회고에 의하면 전두환과 노태우를 보호해준 사람은 경호실장 박종규였는데, 박종규는 윤필용과 같이 하나회를 후원하긴 했지만 두 사람간의 사이는 안좋았다. 


2. 마찬가지로 강창성의 책에 나와있는 얘기인데 베트남전때 전두환은 여러모로 문제적 행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베트남 귀국후 9사단장이랑 주월사령관이 전두환의 훈장수여를 반대했던 게 대표적인데. 이때 강창성의 기록중에 전두환이 전투 공훈이 없자 베트남 밀매상으로부터 몰래 총이랑 포탄 같은걸 암시장에서 사왔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말 그대로 전공탈취를 한건데..(옛날로 따지면, 포로 목 베어서 전공이라고 장계 올렸다는 의미) 문제는 강창성이 이 소문에 대한 신빙성을 믿을 수 없다고 적은 점이다. 그래서 기사에도 이 내용은 빠졌다. 참고로 전두환의 훈장수여를 반대한 이세호 주월사령관은 이후 전두환정권때 박해를 받고 강창성도 이때 수모를 많이 당한다. 


3. 김오랑 소령은 사망 이후 사망원인을 전사로 할지 순직으로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국방부에선 순직이라고 계속 주장하다가 2022년이 되어서야 전사로 정리가 된다. 김오랑 소령에 대한 훈장 추서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국방부 내의 은근한 반대를 뚫어내고 훈장 추서를 밀어붙인 사람이 당시 새누리당 유승민, 새정치민주연합 민홍철 국회의원이다. 


4. 대법원 판결의 근거가 된 최규하의 사후결재 시각 기재 문서는 실제 서류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최규하가 실제로는 시각을 적지 않았거나, 최규하는 시각을 적었는데 신군부가 이후 서류철을 하면서 이 내용을 지웠을 가능성이 있는데 판단하기로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대법원이 최규하가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거에는 신현확 총리의 증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현확은 공판과정에서 최규하가 새벽 5시에 사인을 하면서 시각을 기재했다고 증언했고, 이 증언이 실제 증거로 채택된 것이다. 말하자면 신현확의 증언이 없었다면 최규하의 이 행동은 대법원 판결근거가 안될수도 있었다. 왜냐. 최규하는 검찰의 증언요구에 한번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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