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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한 Jul 23. 2024

화두

화두

불교에서 얘기되는 것으로 말의 머리라고 해석될 수도 있으나 일상적으로 회자(膾炙)되는 것은 깨우침의 근간이 되는 물음 내지 의문으로 공안이라고도 한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 화두(話頭)는 불교에서 부처님과 스님들의 말씀이나, 행동, 그리고 문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처음의 주제, 화제가 되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issue)의 뜻으로 '화두'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     

공안에는 1700가지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스님이 선종의 대선승 조주스님에게 물었다고 한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그러자 조주스님은 “무”라고 하셨다고 한다. 불성이 없다는 얘기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범부는 곧이곧대로 해석을 해서 없을 무자로 치부하고 넘겨짚어 없다고 하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이다. 여기서 무란 것은 개란 것이 가지고 있는 불성이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즉 개에게 불성자체가 없는 것보다는 무의미하다는 것이고 그 물음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오묘하고 이해하기 힘든 얘기이다.     

다음으로는 호리병 속의 새라는 것이 있다. 새가 조그맣고 어렸을 때 호리병 속에 새를 넣고 키웠었다 그런데 그 새가 호리병을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자라고 커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호리병 속의 새를 죽이지 않고 호리병도 깨지 않고 어떻게 꺼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화두인 것이다. 인간의 상식이란 범주로는 해결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난제의 하나일 수 있다. 시공의 범주를 벗어난 세계에 속해 있다면 혹은 시공을 초월한 차원의 세계에서 본다면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수도 있다. 화두를 풀기위해 가정한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어렸을 적의 새였던 때로 되돌릴 수 있다면 쉽게 답이 풀릴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 없는 게 이것의 키워드이다. 위의 화두에 관한 것이 소설 만다라에서 얘기되는 화두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이런 얘기로 해보면 차원의 세계이다. 점이 일차원이면 선은 이차원이고 면은 삼차원 공간은 사차원이라고 하자 그러면 시공을 초월한 차원은 오차원이나 그이 상인 차원의 문제에서 선의 세계에 산다고 가정하면 점의 세계가 참으로 가소로워 보일 것이다. 다음으로 사차원에 사는 사람은 삼차원에 사는 사람이 답답해 보이기 마련이다. 깨달음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무리 현상계의 잘못된 부분을 얘기하고 공간을 넘어선 시공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그 굴레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허망해 보이리라.     

다음 이야기는 어느 소설속에 나오는 일화이다. 어느 산사의 한 절에서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키워주고 길러주던 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인근 절로 가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 절의 스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정을 듬뿍 붙이게 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두 절이 서로 으르렁거리게 되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두 절이 서로가 우리 고양이라고 우기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큰스님이 재결을 하게 되었다 서로의 의견을 들어보니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릴만한 묘책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이 큰스님은 문제의 불씨를 안고 있던 고양이를 죽여 버림으로써 사건을 그만 종결지어버렸다 그리고 난 후 저녁에 탁발을 나간 한 젊은 스님이 돌아왔다. 큰 스님이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설명하고 너라면 과연 어떻게 했겠느냐고 질의를 던지자 그 스님은 대답 대신 가만히 일어서서 자기가 신고 있던 신발을 머리 위로 올려놓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스님의 독백이 이어졌다고 한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왜 큰 스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왜 탁발승이 있었으면 고양이가 죽지 않았을 것인가를 머릿속에 마음속에 깨치는 공안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 빗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처럼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차원을 떠나서 미망 속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아니고 둘도 아닌 해탈의 경지로 가기 위한 경계의 접점에 있는 것이 바로 화두인 것이다.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없고 그 의미 자체를 쉽게 유추해 내고 해석할 수 없고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부분일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 보리수 앞에서 좌선을 한 6년의 성과를 통해서 깨칠 수 있었던 부분인 것이다. 허상도 아니오 실상도 아닌 공즉시색(空卽是色)것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인 진리 그 자체인지도 모를 일이다.     

점심에 관한 일화도 엄청난 내공을 품는 한 사례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덕산스님은 서촉에서 <금강경>을 강의하던 유명한 교학자였다. <금강경>의 해설서를 쓸 만큼 해박하여 사람들은 그를 <주금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느 날 남방에서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면서 교학을 우습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혼내 주려고 바랑을 메고 길을 떠났다. 풍주에 도착한 덕산은 요기를 하기 위해 길가의 한 할머니의 떡가게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서 오시오.. 그 바랑은 여기 내려놓으시고.”     

덕산이 바랑을 벗자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이슈? ”     

“금강경 주석서요. 아주 귀한 책이지요.”     

“호오, 그래요 잘됐구먼,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 했는데 스님이 좀 가르쳐 줄 수 있겠소?? 만약 내가 묻는 것에 제대로 답을 하면 제가 공짜로 점심을 공양하리다.”.”     

“금강경이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고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마음의 점)하려는 지요?”)하려는지요?”     

“…….” '할머니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못한 덕산은 약속대로 점심을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참으로 오묘하고 불가해한 것이 화두가 아닌가. 어찌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듯도 하고 잡힐 듯도 보이지만 결코 그 본질을 헤아릴 수 없듯이 막막하게 여겨지는 게 또한 화두인 것이다. 그 할머니는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석가가 6년 동안의 고행을 통해서 얻었던 그 깨우침 오도가 어떻게 한순간에 통달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한참 고차원의 세계 속에 있는 듯하며 그렇게 공부를 했음에도 일개 노파의 질의에서조차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는 범부(凡夫)가 그 세계를 경험해 보고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보통의 사람이 쉽게 이룰 수나 있는 일일 까도 의심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3333년 전에 체험한 산사생활은 오늘날의 템플스테이와는 많이 상이하지만 조금 소개하는 것으로 화두에 대한 결론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순천 송광사를 찾았다. 머리를 삭발하고 오신 분도 있었다. 반가부좌를 하고서는 좌선을 하였다. 간간히 죽비 소리가 들리고 밤늦은 시간에는 졸음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인간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가. 짧은 20년간의 삶이었지만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난 세월들이 펼쳐졌다. 선방에서 초심자로서 50분간의 좌선이 끝나고 법당을 한 바퀴 돌아볼 때에는 사방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하늘만큼은 사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눈이 시리도록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산사를 가로지르는 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는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내 품 안에 온 우주가 들어와 앉은 듯한 가슴 벅찬 감동이 물밀듯이 흘러들어오기도 하였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마음을 비워야 하고 부처가 마당 가운데 잣나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곰곰이 되씹어도 보았지만 하루아침에 결코 그 참뜻을 깨칠 길은 없었다. 새벽 3시 30분에 아침 예불을 하고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주옥같은 법문을 두 차례 듣고 시인 고은님의 설법도 한차례 들었다. 송광사에서 우리는 2박 3일간의 철야좌선이 있었고 마지막 날에는 조계산을 올라가 천진암의 쌍향수를 보았다. 이틀의 밤샘에도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정신수양에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는 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108배도 하고 다도도 하고 선무도도 하고 울력도 한다는 모양이다. 아무튼 젊은 날에 꼭 한 번은 체험해 볼만한 정신수양의 장이 되리라 여겨진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자녀나 식구 모두가 종교적 의미로서의 템플스테이가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수양의 기회로 조용한 산사를 찾아 템플스테이를 체험해 봄이 어떨까 한다. 제대로의 화두를 심도 있게 맛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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