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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24. 2024

근거의 근거의 근거

"목적 없는 사유란, 단지 지금 아는 바로 그 목적만을 포기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7권 <<상징과 리비도>> 중 <사고의 두 가지 양식에 관하여>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며칠 전, 꿈을 하나 꾸었다.


[ 꿈속에서 나는, 남은 음식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때 저 멀리 어딘가에서 커다랗고 누런 개 두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와 내 손에 든 음식을 채어 물고 간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하늘 높은 곳 어딘가에서도 두 마리의 독수리가 쏜살같이 날아내려 와 개들과 함께 손에 든 음식을 채어 물고 날아간다. 순식간에 음식은 사라지고, 개들과 독수리가 혹시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되던 꿈 속의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날 저녁 가족들에게 내 꿈을 어떻게든 해몽해 보라 했다. 무심하게 듣는 줄 알았던 고등학생 딸은,


"어쨌든 쓰레기를 다 치워주니 좋은 거 아니야?"


라며 성의를 보이는 반면, IT업계 종사자인 남편은 (피곤한데) 제발 또 그런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억지로 대꾸한다.


"아우~ 몰라, 그걸 어떻게 해몽해!"


*


남편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다. 거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런 (내게는 많이 부족한) 남편 안의 꿋꿋한(!) 합리성 덕분에 나는 실은 항상 든든하다. 융은 인간의 사유 양식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목표 지향적 사고방식이다. 내 꿈에 대한 남편의 반응은 아마 이에 해당될 것이다. 커다란 개가 두 마리나 등장한 진짜 '개 꿈'에 대해 시간을 들이느니, 실질적이며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꿈은 한낱, 뇌 속 어딘가에 저장된 기억의 우연적인 조합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유의 정 반대편에는 또 다른 사유의 양식이 있다. 그건 바로 인류에게 끝없이 신화와 종교 같은 것들을 창조하게 만드는, '그냥 저절로' 솟아 나오는 꿈과 환상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사유 양식은 합리적 사유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목표지향적 사고는 정신 속에서도 주로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인간에게 있어 언어의 역사는 노래나 춤, 그림 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매우 짧기 때문이다.


"목표 지향적 사고는 전달을 위한 것이고 언어적 요소를 지니며 사람을 힘들고 지치게 한다. 반대로 꿈과 환상은 힘들지 않게, 이미 존재하는 내용으로 무의식적 동기에 이끌려, 말하자면 저절로 작업한다. 목표 지향적 사고는 새로운 것을 얻어내고 적응하며 현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현실에 작용하고자 한다. 꿈과 환상은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주관적 성향을 해방시키며 적응면에서는 비생산적이다."


*


'저절로' 꾼 꿈은, 도대체 왜 그런 꿈이 꿔진 건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내가 꿈 해몽을 해보자는 건, 그것으로 나의 미래를 예측하겠다거나 아니면 과거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겠다는, 또다시 그런 합리적-목표 지향적 의도는 아니다. 단지 일종의 놀이로서, 수수께끼 같은 꿈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해 이런저런 추측을 '창조'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위해서다. 게다가 꿈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누구의 의견도 아무리 엉뚱한 상상도 부정되지 않는다.


꿈속에서 나는 남은 음식을 '바가지' 같은 것에 들고 나왔다. 딸은 그걸 (음식물) '쓰레기'라고 여겼지만, 나는 좀 다른 걸 떠올렸다. 제삿날이나 명절에 상을 차리고 절을 하고 나면, 시어머니는 '바가지'에다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골고루 조금씩 덜어내서 집 대문을 열어놓고 현관문 밖에 내놓으셨다. 대체, 누구 먹으라고 그러실까? 나중에 알고 보니 예부터 내려오던 '고수레' 관습을 지키고 계신 것 같았다. 맛있고 좋은 음식을 짐승들과 또 상을 받은 조상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신들(!)과 함께 나눈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면 두 마리의 개는? 개는, 가장 먼저 사람 곁에서 함께 사냥을 하면서 노동의 동반자가 되어 온 동물이다. 그래서 두 마리의 개에서, 나는 내가 하는 두 가지의 노동을 떠올려보았다. 하나는 내가 꾸려놓은 가정에서의 노동과 새로 하게 된 활동가로서의 노동.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는 독수리는, 노동하는 속세적 관점과는 먼 삶을 떠올리게 한다. 고상하고, 중력에 거슬러 올라야 하므로 힘차고 용맹한 느낌이다. 땅에 붙어 살아가는 내 안에도, 그런 독수리 두 마리가 있기는 있다. 그건 바로, 아무도 안 시키는데 (아니 때로는 말리기까지 하는데도) 쓸데없이 나의 큰 열정을 바치는 글쓰기와 요가다.


두 가지의 세속적 노동과 두 가지의 신성한 놀이의 신에게, 꿈속의 나는 아주 공평하게 제물을 바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느 한 신에 얽매이지 않고, 잡아 먹히지 않고, 네 가지 일을 모두 골고루 균형 있게 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내가 바가지를 들고 집 밖으로 나온 걸 보면, 다행히 개와 독수리가 집 안까지 침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직 못 본 꿈속 내 집 안에서 꿈속의 나는 아마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고, 음악을 듣고, 창밖을 보며 멍 때리거나 식물에 물을 주고, 무엇보다도 잠을 자면서 재미난 꿈을 꾸고 있을 것 같다.


*


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꿈보다 그럴듯한) 해몽을 했냐고 물으신다면, 그리 묻는 그대 안의 어떤 '근거'도 오래전에는 실상 아무 근거가 없었던 것이라는, 매우 엉뚱한 답을 해본다. 지금 우리 모두는 '경제적 이익'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전 사람들은 '신의 뜻'에 대해서 그랬었고, 더 오래전 사람들은 '자연 안에 깃들어 있는 영혼'에 대해서 그랬다.


융은, 아무런 목표 관념 없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꿈과 환상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목표에 대해서만 포기한 것이고, 실제로는 더 오래되고 더 깊은 심연의 목표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일깨운다. 자연을 보면,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저절로'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식물들에게, 나름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한) 목표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말더듬이는 자신이 위대한 연설가라는 환상을 갖는다... 가난뱅이는 백만장자라는 환상을, 어린아이는 자신이 어른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압박당하는 사람은 압제자에 맞서 승승장구하는 싸움을 하며, 쓸모없는 사람은 야심적인 계획으로써 자신을 괴롭히거나 위로한다. 사람들은 환상을 통해 자신을 보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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