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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27. 2024

요런 기쁨은, 아직 허술하도다!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우리에게는 감정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함들을 논리적/신체적으로 구분한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충동에 대한 의식), 이 세 가지를 기본 감정으로 설명한다. 다른 모든 감정들이 이 세 가지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기쁨과 슬픔에 대한, 논리적/신체적 정의를 기억하자.


"기쁨이란 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며, 슬픔이란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다." (3부, 정리 11의 주석)


스피노자에게 '완전성'이란 실재성(實在性) 즉 어떤 능력이나 역량을 나타낸다. 따라서 더 큰 완전성을 갖는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음이고, 정신이 그렇다는 건 동시에 신체도 그렇다는 말이다. 앞서도 강조했듯, 정신의 관념들은 신체 변용과 함께/동시적으로(어떤 것이 선행하거나 다른 것이 뒤따르는 게 아니다!)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정은 우선, 수동적이다. 감정은 태초에 자기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고, 다양한 외부 자극들에 반응하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능동적 감정도 있다! 그러나 그건 온갖 수동을 겪어낸 한참 뒤에 나온다.)


*


인간은 누구나, 아니 생명은(어쩌면 무생명체조차도) 슬픔보다는 기쁨을 추구한다. 일단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존재를 보존하고, 자신의 행위=사유 능력을 증대시키기를 원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은, 자기 능력 혹은 자기 신체의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시키는 것에 대해 생각(이라기보다는 저절로 일어나는 표상 혹은 상상)하는 일을 싫어한다(증오한다). 반대로 정신은 자신의 능력 혹은 신체의 능력을 증대하거나 촉진하는 것에 대해 생각(이라기보다는 저절로 생겨나는 표상 혹은 상상)하는 일을 좋아한다(사랑한다).


"사랑이란 (자기 능력을 확장시켜 주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일 뿐이며, 증오란 (자기 능력을 감소 혹은 억제시키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에 지나지 않는다."(3부, 정리 13의 주석)    


우리에겐 매우 소중한, 사랑과 증오에 대해 스피노자는 "(~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들은 외적 요인에 의해 유발된 수동이고, 수동적인 관념들은 그 원인이 되는 관념이 내 안에 없기 때문에 아직 적합한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1종의 인식) 스피노자에 따르면 누군가 당신을 기쁘게 하거나 괴롭게 한다는 그 생각(이라기보다는 표상 혹은 상상)은, 아직 적합하지 않다. 누군가가 당신 안-신체 혹은 정신의 무언가를 작동시키는지에 대한 당신 자신의 이해가 아직 없기에, 그건 잘린/사슬이 중간에서 끊어진 관념인 것이다.


*


그런데다가 내 감정을 일으켰다고 표상되는 외부의 대상조차도 실상은 확실치 않은 때가 많다. 인간사는 단순하지 않아서 언제나 많은 일들이 동시에 벌어지는데,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우연히 그 주변에 있던 것들로 원인을 잘못 귀결시키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또 사람들은 현재 눈앞의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도래하리라 믿는 현재와 '유사한' 사물에 대해서도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 그런 것들을 상상할 때, 정신과 신체는 현재 눈앞에 있는 대상과 똑같이 동일한 신체 변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물을 미래 혹은 과거로 생각하는 동안 동요하여 대게 그 사물의 결과에 대하여 의혹을 품기 때문에, 사물의 유사한 심상으로부터 생기는 감정은 그렇게 확고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 사물의 결과에 대하여 보다 확실히 알 때까지는, 대개 다른 사물의 심상에 의하여 교란된다." (3부 정리 18의 주석 1)


그런 대표적인 감정이 희망과 공포다. 우리가 희망이라 부르는 것은, (그 결과가 확실치 않은) 미래 혹은 과거의 사물의 심상으로부터 생기는 '변하기 쉬운' 기쁨(일 뿐)이다. 공포 역시 마찬가지로 의심스러운 사물의 심상으로부터 생기는 '변하기 쉬운' 슬픔(일 뿐)이다.


*


스피노자가 콕 집어주는 허술한 기쁨 중에서, 특히 (쪼잔한) 내 눈에는 이런 문장이 확 들어왔다.


"자기가 증오하는 것이 슬픔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기쁨을 느낄 것이다." (3부 정리 23)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 못 되면, 거참 쌤통이 아닌가! 그런데 스피노자에 의하면 그런 기쁨은 언제나 마음의 동요를 수반하기에, 온전하지 못하다. 


"이러한 기쁨은 확고한 것이 아니며, 마음의 갈등이 따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와 유사한 것이 슬픔의 감정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표상하는 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또 반대로 자기와 유사한 것이 기쁨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표상하면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부 정리 23의 주석)


실상 스피노자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쌤통이라고 생각하는 한 순간 좀 나아진 기분은 그런 생각을 한 자기 자신의 쪼잔함에 다시금 나빠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만약 나에게 잘못한 누군가에게 복수를 행한다고 해도 그건 항상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아픔을 이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와 나는 신체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런 신체의 유사성 덕분에, 우리는 타자에 대해 공감과 연민이 가능하다. 


*


기쁨을 추구하려는 우리 정신-신체의 본성으로부터 가장 허술한 기쁨이 만들어지는 데, 그것은 바로 '거만'이다. 


"이 정리들로부터,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정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며, 반대로 자기가 증오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기 십상이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표상이 자기에 대하여, 적정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 자신에 관계할 때 거만으로 불리며, 이는 광기(狂氣)의 일종이다." (3부 정리 26의 주석)


스피노자가 거만을 '광기'라고까지 부르는 이유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그저 상상만으로)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자기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자신의 능력 미달과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때에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돈키호테?) 그래서 그의 세계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고, 그의 기쁨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는 순간, 그 허술한 기쁨은 바로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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