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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15. 2024

감정이라는 사물(事物)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인간의 윤리에 대한 책이다. 그런 책의 가장 많은 지면은, 감정에 대한 설명과 논증에 할애되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게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법과 규칙도 감정까지 제어하진 못하며, 모든 심각한 사회 문제는 실상 감정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감정이 마치 인간의 결함인 양 악의 근원으로 바라보거나, 의지로써 감정을 억누르려 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능력과 약점의 원인을 공통적인 자연의 힘에 돌리지 않고, 내가 모르는 인간 본성의 결함에 돌린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슬퍼하고 비웃고 경멸하거나, 또는 (더욱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저주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바로 이런 관점을 뒤집어버리고 싶어 한다.


*


세상에서 인간 본성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해지는 많은 것들은, 각자의 입장이 반영된 관점-편견일 뿐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스피노자는 확실하지 않은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그냥 믿지 않는다. 그런 그가 확실히 믿는 건, 인간이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인간 역시 무한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뿐이다. 또한 그런 자연의 일부인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 역시, 자연의 일부의 일부인 신체와 정신이 역시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증오, 분노, 질투 등의 감정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다른 개개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정들은 일정한 원인이 있거니와 그 원인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으며, 단지 고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다른 사물의 특성들과 같이 인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정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3부 서론)


그러니 감정을 컨트롤하고 싶다면,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기 이전에, 자연 안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또 그런 자연적인 감정의 역학 법칙은 어떠한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스피노자는, 감정을 감정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행히 감정은 신체적-물리적 현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마치 사물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  


"감정이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3부 정의 3)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것의 관념은 정신의 사유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한다." (3부 정리 11)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도 관념(개념)이다. 그러나 정신의 관념은 언제나 신체적 변용과 함께다.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는 명확지 않지만, 정신에 긍정적이고 좋은 감정이 일어날 때 신체는 동시에 활동적이며, 반대의 경우라면 신체는 매우 위축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


신체 활동과 긴밀히 연결된 이러한 정신의 감정은 대체로 수동적 개념(관념)이다. 인간은 매우 연약한 상태로 태어나기에, 신체는 처음부터 외부에 의존하여 성장하고 활동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외부 자극에 따라 신체의 상태가 변화되는 신체 능력을 지녔다. 


내가 원인이 아닌 것이 나를 변화시키므로, 우리가 처음 느끼는 기쁨과 슬픔은 수동적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장하고 어른이 되었다 해도, 만약 그가 계속 세계의 사물에 대해 무지하거나 주위 세계를 변화시킬만한 힘이 없다면, 그의 기쁨과 슬픔은 여전히 수동적인-외부 의존적인 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나는 기쁨을 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며, 슬픔을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다." (정리 11의 주석)


'수동'적 감정의 원인은 안에 없다. 신체 변용과 그에 따른 감정의 결과만 존재하는 잘리고 혼동된 개념은,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던, 부적합한 개념(관념)이다. 


"정신의 능동은 오직 적합한 관념에서만 발생하며, 정신의 수동은 적합하지 못한 관념에만 의존한다." (3부 정리 3)


*


스피노자와 결이 다른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 정신이 품는 이런 부적합한 관념을 '오류'라 부른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를 1종 '인식'이라고 부른다. 부적합한 관념은 인식의 시작점 즉 적합한 관념으로 도약할 가능성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적합한 관념은, 아무리 오류라 부르며 억압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운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결심한다고 안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사라지기는커녕, 모든 관념들은 머릿속에서 그려냈다 지웠다 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정신 속의 객체적 실재이기 때문에, 그 실재하는 사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기 위해 무한정한 시간 동안 노력한다.(코나투스, conatus) 이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부적합한 관념이거나 수동적 감정이거나 모두 마찬가지로, 영원한 신의 속성의 부분적 발현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 (3부 정리 6)


*


따라서 우리의 의지로써 결코 없애버릴 수 없는, 수동적 감정이라는 사물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을 써야 한다. 첫 번째는 더 힘이 세고 강한 사물 즉 더 큰 감정, 예컨대 공포나 희망 등에 의해 억제하고 억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아무리 강력한 독재정권도 언젠가는 혁명에 의해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감정의 폭풍우는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과 비극을 몰고 올 수 있다.


두 번째는 내 안에 생겨나는 감정에 대한 인식을 시도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미운 사람을 내가 미워하는 원인을 그 사람이라는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 내, 부적합한 관념을 적합한 관념으로 변화시키기. 그런데 어떻게? 그 오묘한 방법들은 계속 이어지는 [에티카] 3부와 4부의, 온갖 감정과 감정이라는 사물의 역학에 대해 스피노자가 아주 기하학적으로 정리한 명제들 속에 다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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