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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Apr 18. 2024

나의 '귀여운' 작은 완전성에게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지금 나는 스스로를 '스피노자주의자'라 떠벌린다. 그러나 처음 스피노자를 접했을 때 '의지의 한국인'인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리들에 받았던 충격이 아직 생생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2부 정리 35)


심지어 들뢰즈에 따르면, 바로 이 명제야 말로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그토록 오래 공들여 쓴 이유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거의 10년이 넘도록 붙들고 쓰고, 다시 쓰고, 고쳐 썼다. 그러고도 죽을 때까지 세간에 발표하지 않았다.)


"<<에티카>>의 모든 노력은 자유와 의지 사이의 전통적인 연관성을 단절시키는 데 있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


하지만 경험상 우리에겐 분명 생각과 행위의 자유가 있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며,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의지력이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의지란 것이 있기는 하되, 자유롭지는 않다. 아닌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그는, 그렇다면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것을 자유롭게 긍정하거나 부정해보라 한다.


(A) 아직 기하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유치원생이라면, 위 명제에 대한 자유로운 긍정 혹은 부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 아이 안에는 삼각형의 내각의 원리에 대한 관념이 없기에 뭔 말인지 모르므로 그냥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택할 수 있다. (B) 그러나 만약 수학 선생님이라면, 그는 이 명제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C) 물론 수학 선생님에게도 누군가 '1억 정도 줄 테니 부정합시다' 한다면, 그 역시 부정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가 아닌, 진실보다 돈에 속박된 부자유한 선택이다. 그러니 스피노자의 말도 참말인 것 같다.


"정신 안에는 의지를 갖거나 갖지 않는 절대적 능력이 없으며, 단지 개개의 의지작용 즉 이런 긍정 혹은 저런 부정이 있을 뿐이다." (2부 정리 49)


자유의지 옹호자들은 인간의 영혼을 인간 내부의 절대군주처럼 내세운다. 그때의 영혼은 단일한 실재로서, 그 사람의 신체는 물론이고 사유 전체도 좌지우지하는 초월성을 지닌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영혼은, 신체 변용을 통해 정렬된 수많은 개념(관념)들의 민주적 사슬이다.


*


그러니 스피노자에겐 영혼이라고, 다 같은 영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그 정교함이나 견고함에서 차이가 나듯, 관념의 연결인 영혼 또한 그렇다. (A)와 (C)에서 관념들의 연결은 (B)와는 다르다. (A)의 어린아이에게는 긍정 혹은 부정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관념이 자기 안에 없다. 따라서 아이의 긍정과 부정은 '우연적'이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일들은 이렇게, 우리 자신의 무지(=앎의 한계)에 대한 표현법에 불과하다.


(C)의 수학 선생님은, 무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과 다른 대답을 한 뒤에 스스로 겪어야 할 '내적 동요'에 대해, 또 거짓으로 얻은 부(富)가 가져올 삶의 소란함과 언젠가 진실이 드러났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명예의 실추 등등에 대한 '적합한' 숙고를 하지 못했다. 스스로 알고 있는 진실에서 느끼는 적당한 기쁨이 외적 자극이 제시하는 짜릿한 쾌감의 강력함 앞에서 스러져간 것이다.   


"의지와 지성은 동일하다." (2부 정리 49의 따름 정리)


무지한 영혼, 즉 견고하지 못한 관념의 연결을 스피노자는 '작은 완전성'이라 말한다. (그는 결코 불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데, 나는 스피노자의 이런 면이 차~암 좋다!) 부적합한 관념이 적합한 관념으로 도약하듯, 작은 완전성은 큰 완전성으로 자라날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지만, 자유롭게 되고 해방된다.... 자신의 행위 능력을 소유하게 될 때, 인간은 자유롭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스피노자에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다. 신은 외적인 힘 즉, 자기보다 센 외부 사물의 필연성이 아니라 오직 자기 본성의 필연성 - 내적 관념들의 단단한 사슬에 따라서 사유하고 행위한다. 물론 신이 아닌, 일개 인간들은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삶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행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그는 신 쪽으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며 더 자유롭다-더 완전하다.

    

*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에, 사람들은 그의 책을 불사르고 금서로 만들고 수백 년 동안 땅 속에 파묻어버렸다. '의지주의자'로 살아온 나는 그런 이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잘 살기 위한 나의 노력이 나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스피노자가 아무리 '기하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해도, 내 마음속 의지주의가 단번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많은 똑똑한 '의지주의자'들은 그의 논리가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한 증명의 허술함을 찾아내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의지주의자인 나는 또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스피노자의 '의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의지주의자들은 잘난 척도 좋아하고, 또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타인들을 향해 '분노'의 감정, 즉 부적합한 관념으로 단죄하기 쉽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왜 나만큼 열심히 노력 안 하지?' '왜 나태하지?' '왜 바보처럼, 좋은 것을 놔두고 나쁜 걸 선택하지?' (자기 기준인) 자만심과 분노는 비난을 부르고, 비난은 더 나쁜 상황을 연출하는 악순환을 부른다. (내가 그랬다는 말이 맞다. ㅠㅠ)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단죄. 누군가를 '악'으로 낙인찍기보다는, 아직 앎의 기쁨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라 여기는 사회. 그것이 라틴어로 '윤리학'이라는 뜻인 그의 <<에티카>>가 바라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바꿨다. 내가 노력하고 싶어 하는 것들에서는 여전히 의지주의자로서 살아가지만, 타인과 세상을 향해서는 필연성주의자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그렇게 부정적 감정 소모로부터 절약된 에너지로 나의 '귀여운' 매우 작은 완전성에게 물을 주련다!


"이 이론은 우리에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비웃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성내지 않고 시기하지 않는 '자세'를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생활에 기여한다." (2부 정리 49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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