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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r 29. 2024

‘부적합’과 ‘적합’의 거리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스피노자의 개념(관념)에 대한 정리를 읽다가 나는 그만 점점 더, 인간이 타고난 열악한 인식의 조건에 대한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부적합한 관념들의 향연이 인간 정신이라니!


 "인간 정신은...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2부 정리 24)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은...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2부 정리 25) 신체의 부분 변용에 대한 관념은... 적합한 관념을 함축하지 않는다.(2부 정리 27)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2부 정리 29) 우리는...완전히 부적합한 인식만을 가질 수 있다.(2부 정리 30) ...완전히 부적합한 인식만을 가질 수 있다.(2부 정리 31)" 


인간이 그렇다면, 나 또한 그러할 것. 부적합한 인식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에 대한 비애로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려는 찰나, 갑자기 이런 정리가 눈앞에 '뿅~!'하고 나타났다.


 "우리 안에서 적합한 모든 개념(관념)은 참되다."(2부 정리 34)


정리 31과 정리 34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


이 세상엔 분명 '적합한' 인식이 있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부적합한 인식의 조건에 놓인 인간이 어떻게 적합한 인식으로 헤쳐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에게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사물 속에는 서로 공통적인 게 있기에 적합한 인식이 가능하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이면서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관념들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다."(정리 38과 따름 정리)


내가 증오하고 나를 괴롭히는 그 인간과 나는,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데?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서로 간에 아무 공통점이 없는 것들은, 마주칠 수 없고 행여 마주치더라도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니 나에게 쿨한 사람보다, 오히려 나를 괴롭게 하는 그 인간이야말로 어쩌면 나와 공통점이 더 많은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 공통점이 전혀 없는 사물들은 그것들 중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 (1부 정리 3)


*


스피노자에 따르면, 나를 괴롭히는 그 어떤 인간뿐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사물과 내가 갖는 원초적인 공통점도 있다.


 "물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관해서는 서로 구별되지만, 실체에 관해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2부 정리 13의 보조정리)


우리는 각자 구별되는 실존들이다. 예컨대, 토끼와 거북이는 속도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바로 그 차이를 만드는 속도를 지녔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사물의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우선 보이게 마련이다. 실상 그것은 신체가 살아남고 지속하기 위한 '자연의 공통 질서'다.


 "정신이 사물을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라 지각할 때, 외부로부터 결정되어 사물들과 우연히 접촉함으로써 이것 또는 저것을 생각할 때, 정신은…단지 혼란스러운 <그리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진다." (2부 정리 29의 주석)


살기 급급해서, 급하게 내 사정에 맞춰 상상해 낸 개념들은, 전체 (신적) 인식의 사슬에서 보면 매우 단편적이다. 바쁘게 배나무 옆을 지나가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그러나 (먹고살 걱정이 아닌) 지적 연구에 골몰하다 배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어떤 이들에겐, 같은 장면에서 단편적 사고의 앞 뒤가 연결되고 인과 관계의 올바른 순서가 예측 되기도 하면서 ‘만유인력의 법칙'이랄지 ’날개 달린 것의 본성'같은 것이 보일 것이다.


 "사물을 영원의 상(像) 아래에서 지각하는 것, 즉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고찰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에 속한다… 이 개념들은 시간과 아무런 관계없이, 영원의 관점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2부 정리 44의 따름 정리)


*


스피노자에게는 '사람'이나 '돌멩이'나 '나무'나 '새'나 모두 습관적인 말일뿐, 각자는 모두 운동과 정지 비율에 따라 행위-사유하는 사물이다.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은 '스피노자 좀 읽은' 사람은, '저 인간이 왜 나를 괴롭히지?' 대신, 우선 "저 사람-사물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은 어떠한가?"라고 자문하는 게 좋겠다. (물론 그러기 쉽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뒤따랐던 부적합한 개념들 예컨대 '저 인간이 나를 만만하게 보나'라든가 '전생에 나랑 무슨 웬수였나' 등의 사슬에 엮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차분한 마음으로, 마치 자전거 타기 연습을 하듯, 내가 이 사물을 탈 수 있겠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운동-정지하는 사물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만들려면, 홀로 상상하는 게 아니라,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 것처럼 약간은 고된 신체적 훈련도 함께 필요하다. 부적합한 개념(관념)이 그렇듯 스피노자의 적합한 개념(관념) 역시, 하늘에서 바로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기는커녕 적합한 개념의 출발점은 바로 부적합한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참과 거짓, 진리와 오류를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내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가장 사랑하는 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우리 정신에 형성되는 모든 관념들이 그 자체로는 오류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이 역시 내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정말 좋아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모두 '스스로 하는 모든 행위를 인식-사유하는' 신의 무한 지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앞서 부적합한 개념들의 향연에 절망한 내가 놓쳤던, 두 개의 정리는 이렇다.


 "모든 관념은, 신에 관계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참이다." (2부 정리 32)

 "관념 안에는 그것이 허위라고 불릴 만한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2부 정리 33)


그러니 누구든 사물을 '(신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스스로를 괴롭히는 모든 부적합한 관념(오류)에서 기쁘고 즐거운 적합한 관념(진리)으로 도약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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