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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r 16. 2024

개념에 대한, 개념 있슈?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에티카>> 안의 어려운 증명들을 그저 눈으로라도 계속 따라 읽고 싶었던 이유는, 그렇게 가다 보면 중간중간 내게 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개념(관념)에 대한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아주 정확하게, 이런 게 개념이 아닐까라고 내가 믿고 있던 바로 그런 것들을 가리키면서, 바로 그런 게 개념(관념)이 아니라고 콕 집어 말했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관념 또는 정신의 개념과, 우리가 표상하는 사물의 심상을 정확히 구별할 것을 촉구한다. 그다음에는 관념과 우리가 사물을 표현하는 데 쓰는 언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49의 따름 정리의 주석)


*


지금, 내 기분이 좋아지는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빨간 동백꽃들로 뒤덮인 고요한 산사(山寺).' 그런데 이게 개념(관념)이 아니라고?


"개념(관념, concept)이란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정신이 (능동적으로) 형성한(forming)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의 3과 그 해명)


스피노자는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르는, 대개 구체적 현실에서 경험을 통해 기억해 낸, 이미지와 개념(관념)을 구분한다. 비록 이미지가 내 정신 속에 떠올라 오더라도, 그건 내 정신의 작업물은 아니다. 그저 과거의 언젠가 내 신체가 동백꽃과 절과 마주쳤을 때, 유쾌한 경험을 했던 것에 대한 기억일 뿐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그 역시 내 정신의 노동이긴 하다. 그러나 정신이 적극적으로 뭔가를 행했다기보다는, 신체가 외부 물체와 마주쳐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연스럽게?) 신체 상태가 변화되었고, 정신은 그것을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연스럽게) 감지한 것에 가깝다. 이는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정신'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살피고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정신의 일이다. 물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역시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스피노자가 이미지와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이렇게 특정한 순간에 성급하게 생겨난 표상들을 또다시 성급하게 조합해 매우 복합적인 '요상한' 오해를 만들어 낼까 봐 그렇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스스로 혹은 타인을 괴롭히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이미지와 개념의 구별만큼, 성급한 것과 능동적인 것을 구별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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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개념(관념)이 아니라는 것은 좀 더 쉬워 보인다. 똑같은 동백꽃을 보고도 한국 사람은 '동백'이라 말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camélia'라 하고 일본 사람은 'つばき'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도 동백꽃에 대한 개념(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또 현실의 동백꽃은 금세 시들어버리지만, 정신 속에 형성된 동백꽃에 대한 개념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개념(관념)은 현실적이지 않아도 정신에 실재한다. 심지어 영원하다. (다시 어렵다.ㅠㅠ)


스피노자가 말하는 개념(관념)은 정신의 (능동적) 작업인데 반해, 언어는 생활 습관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런 습관들이 이미지의 습관적인 연결을 만들어 낸다. 예컨대 문학적인(?) 사람은 동백꽃을 보고 남녀 간의 애정을 떠올리고, 화장품이나 향수에 관심이 많은 화학적인(?) 사람이라면 동백꽃과 동백 오일의 촉감 혹은 향기를 연결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정신이라기보다는, (편리함을 위해=사유하지 않기 위해=사유에 쓸 에너지 절약을 위해) 기존의 움직임인 습관을 고집하는 정신의 사유다. 물론 이런 습관 역시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 안에 갇혀버리면,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삶의 범위가 축소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언어와 개념의 구별만큼이나, 편리한 것 혹은 습관과 능동적인 것 역시 구별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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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속 개념은 우리 신체가 외부 물체와 마주쳐 생겨나는 변용 속에서 만들어진다. (스피노자의 개념은, 하늘에서 우리 정신 속으로 곧바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체적 변화 그 자체는 개념이 아니라 단지 개념으로 형성될 대상-재료다. 그 재료를 조물조물하는 건, 이미 우리 정신 안에 있는 다른 개념이다.


"관념의 원인은 (다른) 관념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7~9)

"관념의 대상은 (자기) 신체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13)


예컨대, 동백꽃을 보고 내가 '좋다'라고 느끼려면, 신체가 동백꽃과 만나 변화됨과 동시에, 내 정신 속에 이미 '좋다'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관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개념은, 신체와 정신의 합작품이다. 신체의 감각들이 세계를 느끼면, 동시에 정신은 자기 안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그 느낌에 적절한 관념을 만들고 정신 속 자리를 배치하고, 그와 동시에 신체적 감각은 재구성된다.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에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와 ‘신체가 느끼는 게 달라졌다’는 동의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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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념(관념)에 대해서 내게 더 충격적이었던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외부 물체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 신체의 상태를 보다 많이 나타낸다."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16의 따름 정리 2)


자기 정신이 자기 신체의 느낌으로 만들어 내는 게 개념(관념)이라면, 이는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전의 나는, 세계와 타자에 대한 내 평가-관념은 곧 그 대상의 본성이라 여기는 일이 많았다. 동백꽃 흐드러진 고요한 산사를 좋게 여기는 건 나이지, 동백꽃이나 절 그 자체가 좋은 사물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와 신체적 본성과 상태가 다를 타인들은 똑같은 사물과 마주쳐도 나와는 전혀 다른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나는 종종 내 관념을 그들에게 고집했다.


그러니까 나는 개념에 대한 개념도 없었지만, 내 정신 속 개념의 재료가 되는 내 신체에 대한 개념도, 온갖 개념으로 가득할 내 정신 자체에 대한 개념 같은 것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개념(관념)에 대해 따져 묻다 보니, 결국 내 정신의 모습(정신에 대한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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