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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r 08. 2024

비철학적 철학 혹은 철학적 비철학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그는 아주 독특하고, 극한까지 밀고 나간,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개념적 장치를 소유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그렇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어떤 준비도 필요치 않는 직접적인 만남의 대상이기 때문에, 비철학자, 혹은 전혀 교양을 갖추지 못한 어떤 사람도 그로부터 갑작스러운 영감과 <빛>을 받을 수 있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나는 스피노자주의자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들뢰즈를 만나기 전에 스피노자부터 접했다면, 아마 책을 던져버리고 다시는 철학 '따위'를 가까이 지 않음은 물론이요, 철학의 'ㅊ' 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었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면, 게다가 아직 철학을 읽은 적이 없다면, 더군다나 수학마저 싫어한다면, 지금 당장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펼쳐보시라. 그러므로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던 내가 스피노자주의자가 있었던 건, 순전히 들뢰즈 덕분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맨 처음 철학책 읽기를 시도하려 마음먹은 건, 들뢰즈가  쓴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 제목에 '홀려서', 겁도 없이 벽돌보다 더 두툼한 책을 집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목만 보고 냉큼 사서 펼쳐보았으나, 분명 우리말로 쓰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은 내게 까만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였다. 그런데 정말 '요상'하게도, 나는 그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너무 이해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충동에 휩싸였다. 그렇게 무모하게 철학책을 읽어보기로 결심했고, 그 책을 시작으로 수많은 다른 낯선 철학책들 또한 읽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읽었다고 하여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천 개의 고원>>을 이해할 수 없고, 지금부터 쓰려는 스피노자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한 것에 대해 쓰는 걸 좋아하겠지만, 나는 내가 잘 모르는 걸 써 나가면서 이해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흔히들, 철학은 감정에는 무관심하며 심지어 감정을 억압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한 사고의 산물이라 여긴다. 아마 그런 철학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철학은, 철학을 읽도록 우리의 감정과 충동을 자극하며 결국엔 철학을 사랑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내겐 들뢰즈의 철학이 그렇고, 들뢰즈가 사랑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내겐 그렇다.



*



혼자서 읽기 어려운 철학책을 읽으러 찾아갔던 인문학 공동체 내에서도, 스피노자가 쓴 <<에티카>>의 악명은 대단했다.

처음 에티카를 읽을 때 모든 글자의 뜻을 몰라서 더듬거렸던 흔적. 그러나 지금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다. ^^;;


'정의-공리-증명-결론-주석-따름 정리' 이런 식으로 짜인 불친절한 텍스트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나는 스피노자가 쓴 책을 내려놓고, 그보다도 훨씬 더 두터운 그러나 친절하고 명쾌한 해석서를 집어 들었다. 물론 그 역시 어려운 철학을 읽는 좋은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읽는 데에는 어쩌면 '스피노자주의적'이지 않은, 그래서 '적합하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다. 스피노자는 진리 탐구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떠한 표지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온갖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물의 상념적 본질 즉 관념(개념)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관념의 획득 후에 참된 진리의 표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자체 또는 관념(개념)을 적당한 질서로써 추구하는 길이야말로 참된 방법이다." (스피노자, <<지성교정론>>)


인식을 위해 "무한히 역행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수영을 하기 위해, 우선 PT를 받거나 요가를 배울 필요가 없고 혹은 수영에 관한 책과 영상물을 산더미처럼 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철학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스피노자를 읽고 싶다면 그냥 스피노자를 읽기 시작하면 된다. 대신, 처음부터 전부 이해되지 않는다 하여 책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불완전할지라도" 단순하고 단단한 이해 하나를 만들어내야 한다. (다 이해하겠다는 마음은, 대체로 무엇에서건,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건 책 속의 어떤 한 페이지에서 내 눈길을 잡아채는, 단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시작할 수 있다.


 '정의-공리-증명-결론-주석-따름정리'로 된 <<에티카>>의 전체 논리를 전부 따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들뢰즈의 말대로, 아무것도 몰라도 스피노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그는 <<에티카>> 안에 숨겨두었다. 어려운 증명 사이사이에, 마치 논리적인 것 마냥 끼워 놓은 주석과, 서문과 부록을 읽어보시라. 기하학적인 증명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고, 또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스피노자의 의도와 감정과 욕망과 충동을, 그 누구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철학이란 무엇일까?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서문에서 철학을 말하기 이전에 (사실 그건 매우 길고 복잡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므로), 무엇이 철학이 아닌가에 대해 말한다.


 "철학은 관조(contemplation)도, 반성(réflextion)도, 소통(communication)도 아니다... 철학은 관조도 반성도 소통도 하지 않는다. 비록 철학이 이 같은 행위들 혹은 정념들을 위한 개념을 창조해야만 하더라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을 절대불변인 진리에 대한 탐구라 여기지만, 철학자에게 진리는 개념(관념)의 창조와 동시에 만들어질 뿐이다. 흔히 철학은 도덕과 혼동된다. 그러나 철학은 사고나 행위의 오류를 바로잡는 반성의 기술이 아니다. 철학은 도덕이라 '믿어지는 것'들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이 세계에 항상 처음인, 낯설고 새로운 개념을 출산시키는 철학은, 현재 세계와의 소통과는 아주 멀리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스피노자처럼, 순순히 추방당한다. 스피노자는 태어나고 자라고, 생계를 의존하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는 폭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며 악의적 속임수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까지 모두 입다물던, 신성모독적(이라고 믿어지던) 생각에 대해(그러나 스피노자로서는 매우 신성한 생각에 대해) 단지 '말'을 했을 뿐이다.



물론 '말하기와 생각하기'도 행위이며, 모든 변화는 '말하기와 생각하기'에서 시작된다. 사회가 철학자를 추방하는 이유는 그 사회에는 낯선 그들이 내뱉는 말과 생각이,  그들의 안에서는 이미 창조되어 현실이 되어버린 개념(관념)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런 오묘한 철학에 대해 전부 이해하지도 못하고, 당연히 그에 대하여 설명할 능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영감을 준 몇 개의 구절과 관념(개념)을 통하여,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나만의 불완전하지만 고유한 독해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들뢰즈의 말대로 새로운 개념(관념)에 대한 창조와 그 과정 자체가 철학이라면, 내가 하는 어설픈 독해 역시 아주 작은-그러나 그 자체로 '아주 작은 완전성을 지닌' 철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에티카>>의 스피노자는 스스로 체험한 개념 창조의 내적-기하학적인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스피노자주의자들이 각자 자신의 새로운 개념(관념)을 창조하고 말하도록, 그리하여 이전과는 이미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도록, 매우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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