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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Sep 01. 2023

너는 왜, 우리를 위해 등불을 켜는 것이냐?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철학자들은 어리석은 이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어리석거나 비이성적인) 사람들 틈에 굳이 끼어서 살려고 할까? 지혜롭고 점잖은 철학자들만 모여 사는 현자들의 공동체 혹은 깊은 산 중에서 홀로 도 닦으며 살아가는 철학자의 삶을 상상해 본다.


그런 상상 속 세상에서는, 타인 때문에 생겨나는 괴로움이나 갈등이나 생에 대한 고민 같은 게 없을 것 아닌가. 그러면 아마도 철학이라는, 삶의 괴로움에 잘 대처해 가며 좀 더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고민이 생겨날 이유도 또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존재 이유(?) 또는 효용은 아마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쓰이는 것에 있지 않겠는가. 에픽테토스도 이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개선될 가망 없는) 그들을 떠나 마음의 고요를 찾으라고 떠들어대는 철학을 비판한다.

 

"에피쿠로스도... 그는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인간들이여, 속지 마라... 이성적인 존재를 서로 함께 묶는 자연적 사귐은 없느니라. 나를 믿어라.' 그러면 에피쿠로스, 너는 왜 그런 걸 염려하는 것인가? 우리가 속이든 말든 내버려 두라. 인간아, 왜 너는 우리를 걱정하느냐? 왜 우리 일로 잠도 안 자고 깨어 있는 것이냐? 왜 등불을 켜는 것이냐? 왜 일찍 일어나느냐? 왜 그렇게 많은 책을 쓰느냐?"


*


에피쿠로스가 어떤 맥락에서 저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 말을 하기는 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저런 비판이 에피쿠로스에 대한 오해라고도 한다) 어쨌든 저 속에서 에픽테토스가 말하고 싶은 건, 에피쿠로스든 누구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삼가라는 요청인 것 같다. 그런데 이는 남을 욕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단순한 도덕적 요청이 아니고, 어떤 말이나 생각이던간에 세세히 따져보는 엄밀한 철학자다운 논리적 요청이다.


그렇다면 에픽테토스를 따라 잠시 생각-음미해 보자. 인간들이 나쁘다고 떠들어대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걸 왜 말할까? 그건 아마도, 다른 인간들과 달리 '나만은' 좋은 사람이니 다른 인간들 말은 믿지 말고 내 말을 믿으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것은 모순이며, 논리적으로 명백한 오류다. 왜? 말하고 있는 그 사람 역시, 그가 나쁘다고 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인간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의 관념이 없다면 원의 반지름이라는 관념도 성립될 수 없듯, 모든 인간이 나쁜데 나라는 인간만 좋은 인간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만약 그런 걸 주장하는 철학이 있다면, 그건 '오류의 철학'이라고 못 박는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든 우리가 조금만 '음미해보면' 그렇게 스스로 오류를 드러내는 철학을, 진정한 철학을 흉내 내는 사이비 철학을 언제든지 알아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 오류의 철학이 더 진실한 철학을 향해 더 나아가지 않고, 그저 진실함을 흉내 내는 데에서 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그 사람에게 아직도 허영심과 복수심이 남아있는 까닭이고, 그가 자신의 그런 허영심과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기쁨에서 머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직, 진실한 철학이 주는 그보다 더 큰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의 경멸을 경멸한다. 그대는 나에게 경고하면서 왜 자기 자신에게는 경고하지 않는가? 나의 경멸과 나의 경고하는 새는 오직 사랑으로부터만 날아올라야 한다. 결코 늪에서 날아올라서는 안된다! 그대, 입에 거품을 문 바보여!.. 그대를 투덜거리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그대에 대한 남들의 아첨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대 허영심 많은 바보여! 그대가 내뿜는 모든 거품은 말하자면 복수심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지나쳐 가기에 대하여>)


*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복수하는 기쁨 앞에서 멈추는 철학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그런 허영심과 복수심까지도 끝까지 밀어붙여 따져보는 엄밀한 철학자들은 타인이건 자기 자신이건 인간 자체를 경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성적이지 못한(경멸할 만한) 인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 역시 그저 인간이 지닌 자연적 특성이 아직 더 우세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귀하다 여기는 이성적 특성의 씨앗은 바로 그 자연적 특성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 (고귀한 연꽃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진흙탕 속을 뚫고 나오며 거기에서 계속 양분을 얻듯이)


그러므로 자연적 특성이 어리석어 보인다 하여 그저 폄하해버리기만 한다면, 고귀한 이성적 특성의 싹 역시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연적 특성을 폄하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의를 기울이고 훈련하면서 이성적인 힘을 키워내야 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어쩌면, 어리석음을 금지하려는 '공포와 위협' 속에서 더 크게 자라날 수 있다. 그런 조건에서는 자유로운 생각의 싹이 폭력적으로 잘리고, 생각이 스스로의 능동적 힘을 키울 훈련의 기회가 없다. 그리하여 수동적인 동시에 자기에게 행한 폭력에 대한 복수심에 의해 더욱더 폭력적인 것들만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뜻 보면 어리석음의 폭력은 지혜로운 힘보다 더 강해 보인다. 그러나 엄밀한 철학자의 눈에는 외적 힘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내면의 약함이 잘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어리석은 폭력 앞에서 철학자들이 잠시 몸을 피하기는 하지만 (용감하고 신중한 회피!), 그렇다고 누구보다 강한 내면을 소유한 진실한 철학자는 어리석은 인간들과 결별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들은 당최(!) 인간에 대해 포기할 줄을 모른다.


독재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에픽테토스처럼, 스피노자도 자신의 철학 때문에 유대 공동체로부터 '역대급'의 저주와 함께 쫓겨났다. 그러나 그런 그의 철학은 그렇게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도 사이좋게, 함께, 잘, 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인간에게는 연합을 형성하고... 적당한 유대에 의해 서로 뭉치는 것이, 그리고 절대적으로 우정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익하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는 기량과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변하기 쉬우며 대체로 질투가 심하고, 동정보다는 복수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성정을 용인하면서도 그들의 감정을 모방하지 않도록 자제하는 데에는 비범한 정신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비난하며, 덕을 가르치기보다는 결점을 책망하고, 인간의 마음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허물어뜨리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해악을 끼친다."   (스피노자, <<윤리학>> 4부 부록)


*


권력자들이 철학자를 추방하는 이유는, 그들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협박과 폭력 앞에서, 어리석은 이들과 달리 그들은 두려움에 떨거나 분노하지 조차 않으니까 말이다. '내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의지와 집착을 두지 않기에 당연하다. 그러면 인생이 정말 재미가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외적인 것을 탐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큰 기쁨으로 자신의 생을 즐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축제도 마찬가지이네. 어떤 사람들은 양과 소와 같아서 오직 먹이에만 관심이 있네. 자신의 재산과 토지와 노예, 이런저런 공직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모든 것이 먹잇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네. 반면, 볼거리에 대한 사랑으로 축제에 참석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질문을 던진다네. '도대체 우주는 무엇이며, 누가 다스리는가?...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마치 현실적인 축제에서 구경꾼들이 장사꾼들에 의해 조롱을 받듯이, 그들도 군중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네."


그들은 마치 우리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처럼, 지켜야 할 집도 없고 셈해야 할 의무도 없는 진정한 여행자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생은 축제일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직 철학자가 아닌지라) 내 삶은 여전히 (안주할 수 있는 집을 잃을까) 불안하고 (어떤 것이 더 이익인지 몰라서, 그 손익이 금전이든 명예든 칭찬이든 간에) 혼란스럽다. 그러나 운 좋게도 몇몇 진실한 철학자들을 알게 되었고, 또 운 좋게도 글 쓰기의 기쁨을 알게 되어, 글을 쓰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동안에는 잠시 마음의 고요와 평온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독재자들에게 추방당하듯, 내가 누리는 고요와 평온의 짧은 시간은 (철학을 공부하지 않고 지내는) 나의 다른 시간들과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질투를 사는 것 같다. 인간의 법을 넘어서 신의 법에 대해 말하는 철학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마치 낯선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일상의 의무 이행 속도가 점점 더 느려'터져'지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에 관해서는 필자의 이전 글 https://brunch.co.kr/@a413b74540ba491/121 참조)


그럼에도, 그 짧은 접속의 순간들에 알게 된 진기한 구경거리의 강렬함 때문에, 나는 자꾸만 철학이 보여주는 축제 속으로 유혹당하고만 싶다오~


"너는 철학을 공부하든가 공부하지 않아야 한다. 네가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야 한다면, - 네가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야만 하는지를 확실히 결정하기 위해서 - 너는 그것을 반드시 공부해야만 한다. 따라서 너는 철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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