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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28. 2024

오늘은 그냥 일기

오전 근무가 끝나면, 오후 한 시 반이나 두 시쯤이 된다. 쉬는 시간에 간식만 먹고 점심을 먹지 않고 퇴근하기 때문에 배가 좀 고팠지만 오늘은 집과 반대 방향인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뜨거운 햇볕을 피해서 양산을 쓰고 그늘을 찾아 걷는데, 나는 일부러 (그리운) 햇볕을 따라 걸었다. 내가 일하는 매장에서는 채소와 과일과 기타 여러 가지 식품들을 판매하기 때문에 항상 서늘한 편이고, 냉장실 온도를 유지하는 신선 창고를 수시로 드나들어야 해서 내가 근무하는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기 때문이다. 몸이 점점 따뜻해져서 기분도 따뜻해지고 있는데,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날씨 좋다"


고개를 들어 보니, 파~아란 잉크로 물든 하늘 위에 커다란 흰구름들이 뭉게뭉게 펼쳐져 있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이 무슨, 캘리포니아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보게 해 준 남편 참 고맙네 생각하는데 또 문자가 왔다.


"오늘 회식"


몸도 따뜻해졌고, 하늘도 파랗고, 구름은 뭉게뭉게 한데 저녁밥 걱정까지 덜어내지니 기분이 더욱 따뜻해졌다.


*


도서관 앞 고양이들은 여전히 그곳을 지키며, 행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간식을 챙겨주는 이에게 부리는) 고양이의 애교를 (언제나처럼) 멀리서 보는 듯 마는 듯 (흐뭇하게) 훔쳐보면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일하게 된 뒤로 한 달 정도를 못 갔더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곧장 종합자료실에 가서 미리 생각해 둔 책을 찾아냈다. 그래도 그냥 나오기 아쉬워 서가를 이리저리 몇 번 돌다가, 배가 고프다는 게 생각나서 얼른 대출 등록을 하고 나왔다.


오는 길에 집 앞 상가 반찬가게에 들렀다. 단골집인데 두 달이나 문을 닫았다가 어제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모든 반찬을 직접 만드시는 다부진 사장님이 다리를 다쳤던 까닭이다.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아서, 반 깁스를 한 채로 일을 하고 계셨다. 두 달 만에 보니, 사장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다. 살이 너무 빠졌다고 걱정하는 내게, 사장님은 아주 유쾌하게 농담을 한다.


"술을 못 먹어서 그래요!"


그 덕에 웃으면서,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반찬을 골랐다. 콩자반 한 팩, 궁채나물 한 팩, 먹고 싶었던 오이무침은 두 팩. 만원의 행복이다. 집에 와서, 그 반찬으로 늦은 점심을 차렸다. 식탁에 홀로 앉아, 꼭꼭 씹어 천천히 밥을 먹었다. 아픈 다리를 하고도 만들어 준 오이 무침이 참 맛있어서, 한 팩을 다 먹어버렸다. 그런데 두 달이나 지난 까닭에, 사장님이 쓰는 고춧가루는 내겐 무척 맵다는 걸 깜빡 잊었다. 매웠지만 그래도 맛있게 다 먹고 나니, 속이 좀 쓰려 물을 많이 마셨더니 배가 불렀다. 그래서 소파에 누웠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낮잠을 잤던 바로 그 자리에, 지금은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누워 코를 골며 잠들었다. (낮 동안 서로 뭐 하고 사는지는 잘 몰라도)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햇살을 받고, 같은 곳에 돌아와 등 대고 누운. 그러니~ 내 영감~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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