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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31. 2024

가지 못한 길

어쩌다가, 둘째와 함께 2박 3일 동안 부산을 가게 되었다. 오고 가는 기차에서 읽을 가벼운 책을 찾아보다가, 마스다 미리의 [세계 방방곡곡 여행 일기]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여행길이니, 오랜만에 여행 책? 만화책일 줄 알았는데, 곳곳에 만화로 일러스트가 들어간 에세이집이다. 아직 아껴두고 차례만 읽어보려는데, 정말 다양한 나라를 여행했다. 그중, 언젠가 가고 싶어서 아주 구체적으로 그곳에 대해 알아보면서 계획을 세웠던 '체코'는 참지 못하고 벌써 읽어버리고 말았다.


*


아주 오래전, 어느 드라마 제목에서 '프라하'라는 지명을 듣는 순간, 문득 그곳에 대한 열망이 시작되었다. 드라마의 제목은 내게 (실상 그 유명한 드라마는 못 봤다!) 잊고 있던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읽었던, (이름도 참 멋진)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연상작용이 있었던 걸 보면 그때 아마 나는, 자신의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직 어린 두 아이가 잠들면, 나는 프라하와 체코라는 나라에 대해 검색하기 바빴다. 실상, 두 아이를 데리고도 안 데리고도, 아무튼 갈 수 없는 상황이었을 그때의 나는, 무작정 체코라는 나라에 여행을 간다면 며칠 동안을 어디 어디를 가면 좋은지 그런 계획만 빼곡히 세웠다.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 카프카도 프라하에서 나고, 글을 쓰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 이주 정도면 좋겠다. 카프카의 작업실이 있었다던 이름도 예쁜 황금소로와  프라하 성과 까를교와 바츨라프 광장과 구시가를 마음껏 걸어 다니려면 말이다. 게다가 중세의 멋진 성이 즐비하다는 근교에도 다녀와야 하고, 시장 구경도 하고, 맥주가 유명한 나라이니 비어홀도 가야지! 그렇게 일정을 짜고 동선을 짜다가 피곤해져 아이들을 따라 매번 잠이 들어버린 나는, 대체 언제쯤 누구와 어떻게 여행을 가겠다는 계획은 끝내 세우지 못했다.


*


아이들이 조금 커서 둘 다 걸어 다닐 만 해졌을 때의 어느 날에는, 포카라 호수의 사진을 보고 네팔에 꽂혔버렸다. 그래서 알아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나라였다. 이번에는 바쁜 남편은 두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가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기 위해 '엑셀' 파일로 엄청난 표까지 만들었다.


아이들과 함께니까, 히말라야를 오를 수는 없다. 그래도 히말라야가 보이는 마을에서 며칠 묵으면서 동네 산책은 할 수 있겠지. 또 아이들과 함께니까, 야생의 코끼리 정도는 보고 오는 게 좋겠지. 그러면 치트완 국립공원에서도 며칠을 묵어보자. 포카라 호수 근처 마을에서 아주 느긋하게 쉬고, 부처님이 태어났다는 마을도 들러보고, 원숭이들이 많다는 어느 사원에도 들러보면 좋겠다.


그런 계획을 이렇게 고치고 다시 고치고 하던 어느 날, 네팔에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내가 가보고 싶어 하던 곳들이 폐허로 바뀐 모습을 뉴스에서 보았다. 나는 마치 내가 그곳에 가본 것처럼, 그곳에 있는 것처럼,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한동안 여행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이후로 오랫동안 나의 닉네임은 '히말라야'였다.

 

*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전해 들을 때마다 가보고 싶은 곳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 위에, 순례자들을 위한 표지와 잠자리와 음식과, 또 기도할 수 있는 장소와 고행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언제 들어도 매력적이었다. '내가 과연 그런 순례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나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 긴 순례길 여행의 계획은 아직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진 못했다. 다만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리라는 예상 때문에, 이 여행에 대한 열망이 떠오를 때면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결심한다. 맨 몸으로 가볍게 걷는 게 아니라, 수십일을 지낼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야 하는 길. 또 수십일을 매일 몇십 Km씩 걸어야 하니까, 팔 다리 어깨와 무릎이 튼튼해져야만 한다. 언제, 누구와, 어떻게, 갈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도 열심히 스트레칭과 요가를 하고 또 걷는 연습을 한다. 행여 그곳에 못 간다 해도, 튼튼한 팔 다리어깨 무릎은 남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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