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로 Moreau Jun 02. 2024

부산에 오게 된 사연

어느 날 둘째가 내게 오더니 다짜고짜 부산, 대구, 전주, 청주 중에서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아무튼 그 넷 중에서는 부산이 좋을 것 같긴 한데, 뭔 일 있어? 그러자 둘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누구누구가 그 네 도시를 순회 공연하는데, 지금 표를 구하고 있다고. 흠, 나 이제 막 취직해서 휴가 없는데? 그러자 그러면 자기 혼자라도 가겠다며, 아무튼 자기는 오빠들을 따라가야한다면서, 만일 내가 못 따라간다면 '보호자' 없이 홀로 가겠다며, '미성년 숙박 동의서'를 쓰라는 것이다. 아, 정말, 세상 말세로다~ ㅠㅠ


둘째의 고집을 꺾는데 실패하고 직장에 알아보니, 5월에 만근을 하면 6월에 월차 하루가 생긴단다. (아 나의 귀한 월차를 오빠를 따라가는데 써야 하는구나!) 그러나 토요일에 쉬면 일요일에 출근하는 게 상례인 매장 근무 특성상, 토요일과 일요일을 둘 다 쉬겠다는 건 신입으로써 엄청난 눈칫밥을 먹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선배들은 내게, 이틀 연속 쉴 수 있는 아량을 베풀었다.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면 낮 2시와 저녁 7시, 두 번의 공연을 연거푸 관람하고 일요일 올라오면 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토요일 오전 시간, 서울 경기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부산에 가나? 기차표가 완전 매진인 것이다. 딸과 (대체 왜) 나는 발을 동동거리며, 여러 시간대에 기차표 대기를 걸어놓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딸애가 극적으로 표를 구한 게, 겨우 금요일 오후였다. 나는 금요일 오후에 근무인데? 몰라 몰라, 그럼 나 먼저 내려갈게. 딸은 또 나에게 으름장을 놓고, 나는 다시 직장에 가서 (거의 울다시피)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금요일이 휴무인 천사가 내려와 목요일 휴무인 나와 근무를 바꿔주었고, 나는 신입 사원 주제에 금, 토, 일을 연거푸 쉬는, 매장 근무자로서는 유례없는 엄청난 특혜를 입게 되었다. (선임 활동가 여러분, 정말 감사하고 미안합니다.ㅠㅠ)


*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오빠들의 공연일이다. 오빠들을 만날 생각에 딸은 아침부터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막무가내의 딸 덕분에 완벽한 자유 시간을 얻은, 나는 오늘 무얼 할까 오기 전부터 며칠 동안 이리저리 궁리했었다. 그러다가 퍼뜩, 지난겨울 제주도 여행을 공상하면서 알아보던 요가 클래스가 떠올랐다. 부산 해운대에도 그런 요가 클래가 있으려나? 찾아보니, 숙소에서 약 25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일일 체험이 가능한 요가원이 있기에, 냅따~ 예약했다.


오늘 딸이 공연장으로 떠난 뒤, 요가원 말고 다른 일정이 없는 나는 숙소 근처를 홀로 어슬렁거렸다. '해리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오래된 골목 사이에는 카페와 소품샵과 옷가게들이 숨어있었다. 바닷가에 어울리는 화사한 (싸구려) 원피스라도 하나 장만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고작 낡은 허리 벨트 생각이 나서 허리띠만 하나 사서 허리에 잘 졸라맨 뒤에, 슬슬 요가원을 찾아 걸어갔다.


뜨거운 대낮에 '해리단' 길을 돌아다녀서 그런가, 요가원을 찾아가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졌다. 폰으로 지도를 찾아보면서 가는데,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내가 상상하는) 요가원처럼 보이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도는 아주 오래된 맨션 앞에서 그곳이 요가원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주소를 다시 보니 그 맨션의 어느 동의 3층이 바로 요가원이었다. 아, 주소대로 잘 찾아오긴 했는데, 뭔가 여길 찾아온 게 정말 잘한 게 맞나 하는 불안한 느낌이 들만큼 오래되고 낡은 주택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올라가 보기나 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리자 기다란 복도에, 복도식 아파트의 작은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문 앞에 요가수련장이라 쓰여 있고 살짝 열려있는 문으로 '조용히' 들어오라는 표지판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외로 아주 깨끗하고 환한 수련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요가 매트가 달랑 내 것 하나만 준비되어 있다. 나를 맞이한 지도자분께서 오늘 수련자가 나 한 명뿐이라고 (부끄러움이 많은 내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했다.


*


요가 수련을 하고는 있지만, 나 홀로 지도자와 일대일로 하는 수련은 아직 해본 적이 없기에 시작하기 전부터 신경이 곤두섰다. 나와 단 둘의 수업을 이끄는 젊고 예쁜 요가 선생님의 말로는, 이번 달의 명상 주제가 '고요함'이라면서 고요함에 대해 잠시 여러 가지 명상거리를 내게 던져주었다. 그런데 나는 일대일로 나만 바라볼 선생님의 시선도 그렇고, 말 사이사이에 "에~"하는 버릇이 있는 선생님의 말투도 신경이 쓰여서 마음의 고요를 유지하는 게 초반에는 좀 힘들었다.


그러나 정해진 90분 간의 수련을 하는 동안에 선생님은 나를 파악하고, 나는 선생님에 대해 적응하면서 차츰 고요함 속에서 수련을 따라 할 수 있었다. 한 번 볼 관광객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내가 열심히 해서 그런 건지,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 뭔가 수련이 더 잘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수련을 마치고 나니, 신청자가 단 한 명뿐인데도, 수련을 함께 해 준 젊은 선생님이 너무 고마웠다. 또 낯선 곳에서 낯선 수련 장소를 찾아들어간 용감한 나도 참 고맙고 잘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반겨줄지도 모르면서 낯선 수련장을 찾아가고, 또 어떻게 살던 어떤 사람이 찾아올지 모르는 데도 열린 마음으로 수련장을 열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이 만나고 또 즐겁게 수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무가내로 고집 부려댄 둘째 덕분에 부산에 와서 바다 구경도 실컷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요가 클래스에서 난생처음으로 고급진 일대일 수련까지 받고 나자, 문득 이런 경험을 하게 기회를 만들어해 준 딸과 그 오빠들에게 오히려 고맙구나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효녀였어!


  

매거진의 이전글 부산에 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