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로 Moreau Jun 03. 2024

하얀 운동화

여행 가기 전, 일할 때 신는 운동화를 깨끗이 빨아 널어두고 갔었다. 돌아오자마자 잘 마른 운동화에 줄을 매어 두고, 오늘 아침 하얀 운동화를 신고서 기분 좋아서 퐁퐁 거리며 일하러 갔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내 발을 내려다보니, 군데군데 검은 때가 묻어있었다. 하얀 운동화는 나에게 사치인가 싶어, 속이 좀 아려왔다.


*


실은,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큰맘 먹고 어리석게도 이 하얀 운동화를 장만했던 것이다. 운동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는 오래된 러닝화고 다른 하나는 단화다. 대 여섯 시간을 서 있는 일에는 둘 다 적합하지가 않았다. 또 낡기도 했고. 그래서 남편과 함께 운동화를 사러 갔다.


오래 서 있을 때 편한 신발을 찾는다고 하자, 신발 가게 직원은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본인이 신고 일하는 운동화를 권해줬다. 왠지 믿음이 가서, 고민하지 않고 바로 그걸로 결정했다. 문제는 색상이었다. 남편은 검정을 권했는데, 내 눈에는 흰색이 계속 밟혔다. 여태 신던 러닝화도 검정이었다. 그걸 살 때도 흰색 운동화 쪽으로 마음이 갔지만, 검정이 세일을 많이 해줬기 때문에 잠깐 고민 후에 검정을 샀었다. 그러나 지금은 검정이든 흰색이든 같은 가격이다. 게다가 신발 가게 직원도 '하얀 게 더 잘 나간다'라고 하지 않는가.


다음 날, 나는 정말 아이처럼 신이 나서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일하러 퐁퐁퐁 달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날도 쉬는 시간에 발을 내려다보았을 때, 검정 때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속이 많이 아려왔다. 집에 와서 물티슈로 문질러 봤지만 잘 지워지지 않았다. 이 주 동안, 하얀 운동화에 검정 때가 점차 늘어났고 농도도 점차 진해졌다.


*


서 있는 것만 생각하고 운동화를 골랐으나, 그냥 서 있는다고 운동화가가 검어질 리 없다. 오늘 보니 내 하얀 운동화에 검정 때를 묻히는 주요 범인은, 물품을 싣고 옮기는 대차였다. 매장과 선장고 사이, 매장과 창고 사이, 경사면에 대차를 굴려 올라가야 할 때는 무거운 짐이 실린 대차 앞쪽을 발로 힘껏 밀어야 한다. 만약 내가 하얀 운동화를 계속 하얗게 신고 싶다면, 매장에서 사용하는 그 대차들을 모두 깨끗하게 닦으면 된다!


하얀 운동화를 산 뒤에  다른 직원들은 뭘 신고 일하는지 유심히 살펴 보았다. 대체로 검정 운동화이고, 밑창이 두툼한 낡은 운동화다. 출근할 때는 내 것처럼 하얀 운동화나 예쁘고 화려한 신발을 신고 와서, 일할 때만 갈아 신는 분들도 여럿이다. 만약 내가 대차를 깨끗이 닦는다 해도, 다른 분들의 작업용 신발까지 모두 빨지 않는다면 내 운동화는 다시 검댕이 묻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이, 삼주에 한 순간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그냥 퐁퐁퐁 달려가도록 하자. 그 하얗고 짧은 순간을, 마치 영원(永遠)처럼 즐기면서! (오래 지속되는 것이 영원은 아니라고, 스피노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매거진의 이전글 부산에 오게 된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