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로 Moreau Jun 19. 2024

50일 기념 인터뷰

'남친'과 사귄 지 50일... 뭐 이런 거였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아니고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고^^;;), 취업한 지 어느새 50일쯤 된 요즘 어떤 기분인지 (아무도 내게 묻지 않길래)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


질문 1. 취업하니 뭐가 좋은가?


"비록 관계의 깊이는 얕지만,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 수 있다는 게 아직은 활력소다. (물론 어떤 날엔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동안 몰랐던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도 크다. 같은 식품이라도 냉동, 가공, 야채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취업 전에는 활동가들은 그저, 매장에서 물품을 진열하고 계산하는 단순한 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물품의 발주와 집품과 재고관리, 조합원 가입과 홍보와 응대 등 너무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50일이 지난 지금도, 아직 못 배운 일이 너무 많다.   


새로운 물품이 출시되거나, 행사 기획 같은 것이 매주 혹은 매달 끊임없이 변경된다. 본래 해야 하는 일들의 가짓수도 수백인데 변경되어 기억해야 할 사안들까지도 수십 가지라, 다니는 동안에 치매 걱정은 없을 듯하다. 오늘은 '쌀'에 대한 직무교육을 받았는데, 밥을 오십 년도 넘게 먹었는데 그에 관해 내가 전혀 몰랐던 것이 있어서 놀라웠다. 특히, 단 두 시간만 개화한다는 벼꽃은 참말 이쁘고 아름다워 보였다."


*


질문 2. 취업해서 안 좋은 건?


"너무 바쁘고 육체적으로 매우 고단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래서 내가 그렇게나 취업을 안 하고자 애썼던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취업했다고 해서 나의 그림자 노동인 집안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직장에서 그동안 안 쓰던 근육으로 안 하던 노동을 하고 돌아와, 다시 그림자 노동에 돌입해야 한다. 피곤한 날 조금 게으름을 부리면, 그림자 노동의 강도는 더 높아지고 만다!


그렇다고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 겨우 내 용돈이나 하는 마당에, 가족들에게 그림자 노동을 나눠하자고 말하기도 민망하고. 하여 피곤한 날은 집 안일을 못 본체, 그냥 눈을 감아버리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만 아는 일이야~'하고 나를 위로하면서. 어쩔 수 없다! 요가도 해야지, 책도 읽어야지, 글도 써야지, 친구들도 만나야지, 딸들이랑 수다 떨고 산책도 해야지, 음악도 듣고 멍도 때려야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깐!"


*


질문 3. 일 할 때 젤 어려운 점은 무엇?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는 초보인데, 자꾸 스스로 뭔가 안다고 혹은 이런 게 옳다고 스스로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실수를 한다. 그동안 주로 읽고, 쓰고, 그러기 위해서 깊게 생각하는 몸에 밴 습관이 매장 활동가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생각보다는 신속한 몸의 반응이 필요하고, 아무리 조합원이라 해도 '고객님'들의 다양한 요구사항과 의문에 대처할 때에는 그저 (내 기준의) 인간 된 도리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게 많다.   


그동안 나는 아마도, 내가 (남보다) 잘 못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피하면서 살았었나 보다. 이제 막 들어가서 가장 일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나는 아직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걸 인지하면 마음이 좀 힘들다!) 그리하여 매번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라고 되뇐다. (그리고 괜찮아! 못할 수도 있지, 다른 건 잘하잖아, 이런 다독임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이러다 혹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지금 나를 가두는 '자기 확신'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연습이기도 한 것 같다. 자꾸 연습하다 보면, 빠른 반응만큼이나 생각의 속도도 빨라지고, 수많은 다양한 모습으로 빠르게 자유자재로 변용하는 존재로 변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질문 4.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 것 같은지 또, 출/퇴근 시의 마음가짐은?


"참 우습지만, 이력서를 써낼 때, 멋지게 정년 퇴직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봤다. 하지만 지금은 수습기간 3개월을 넘기면, 그 후엔 딱 그만큼의 새로운 3개월 정도는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일단 6개월이 지나면, 그때 가서 그다음의 날들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특정한 종교는 없지만, 출근할 때마다 잊지 않고 신(들)께 기도를 한다. 오늘도 매 순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과 인내와 겸손함을 주소서. 퇴근하면 가장 먼저, 내 발을 시간을 들여 씻어준다. 대여섯 시간 동안 내가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지탱해 준 내 발님. 정말 수고했어요. 그러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줬다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랬을까, 잠깐 상상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용감한 맨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