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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n 30. 2024

거시기가 참 거시기 하다...

"그놈을 따라가면 어머니들한테로 갈 수 있지요." - 괴테



#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7권 <<상징과 리비도>>의 제2부 <서론> <리비도의 개념에 대하여> <리비도의 변환>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제목에 쓰인 '거시기'라는 말이 곧바로 '성기'나 '성욕'으로 바꿔 읽힌다면, 그때 '거시기'는 기호다. 잘 알려진 대상에 대한 관습적이며 고정된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릴 적, 학교 국어 시간에는 그러한 것을 상징이라 배웠다. 시를 배울 때에도, 시 속의 언어가 상징하는 것에 대한 정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융을 비롯해 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말하는 상징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상징이란, 인간으로서는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변환 혹은 변형시키면서 그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시인이라면 '거시기'라는 하나의 말에서, 무한한 다른 거시기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융은 시인이다. 이 책 속에서 그는 밀러 양이 지은 <나방의 노래>로부터, 나방이 흠모하는 태양, 우리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고 타는 태양(에너지), 자기의 중심에 존재하는 작은 인간, 남근(phallus) 등의 다양한 변형들로 여행을 떠난다.




*


말 하나가 지닌 무한한 상징과 변형에 대해 융이 이토록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것이 리비도의 무한한 변형과 닮았기 때문이다. 리비도라는 말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것은 프로이트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전에도 리비도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키케로는 리비도를 매우 광범위한 의미로 파악한다...'신중함과 끈기 속에서 인간을 충동질하는 것은 소망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성에 맞서고 너무 격하게 흥분되어 있는 것은 리비도, 혹은 모든 우매한 자들에게 내재된 무절제한 욕망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적절하게도 '리비도'를 모든 탐욕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말이라 하면서, 리비도는 통상적으로 충동(Trieb)으로 번역된다고 했다."


리비도는 우리의 '거시기'만큼이나 광범위하고 무한히 변형 가능한 말이었는데, 프로이트 덕분에 '성욕'이라는 명확한 의미로 굳어질 위기에 놓였다. 그렇다고 융이 과거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 과거의 철학자들, 특히 신학자들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지닌 자연스러운 충동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표현했으니 말이다. 융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욕도 과거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부정적 욕망의 의미도 배제하지 않되, 더 광범위하면서도 가능성이 풍부한 의미로서의 리비도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리비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을 어떤 특수한 충동이 아니면서, 그 어떤 영역으로도 즉 권력, 배고픔, 증오, 성욕, 종교 등으로 옮겨갈 갈 수 있는 에너지의 가치라 이해하는 것이 더 신중한 이해방식일 것이다."


*


예컨대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구멍을 뚫을 것처럼 회전시키는, 신경증적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는 막대처럼 긴 것을 작은 구멍에 대고 회전시키는 여러 행위들과 닮았다. 프로이트라면 단연코, 성행위를 떠올릴 것이고 성적 욕구불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학교 시험과 달리, 아무도 정답을 모르니까! 우리들의 무수히 다양한 삶은, 학교 시험이 아니다.


그런데 같은 행위를 본 융은, 태곳적 인간이 불을 만들어 내는 몸짓을 떠올린다. 어쩌면 태곳적 그들도 성적 욕구불만을 해소하려다가, 우연히 불을 발견했을까? 그러나 융에 따르면, 태곳적 인간들이 성적 욕구불만을 지녔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건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러니 불을 발견하게 강제한 건, 성욕보다는 오히려 외적 위험에 대한 불안일 것이라는 융의 말 또한, 매우 그럴듯하다.


지금 자기의 관자놀이를 뚫으려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그는 태곳적 인간들처럼, 어서 불을 발견하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를 강제하는 불안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는 현실이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지닌 충동은 정신적이면서도 생리적인 것이고, 인간 정신의 가장 보수적인 기능으로써 변하기 어렵다. 융은 이런 충동에 대한 '태도', 즉 본능을 만족시키는 삶의 영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태도'가 신경증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그는, 자신의 결코 변할 수 없는 내부 현실인 충동들로부터 계속해서 위협받는다.


*




무엇으로도 변환될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를, 융은 '존재에의 의지'라는 한 마디로 응축시킨다. 우리가 힘들여 내적 에너지를 이렇게 저렇게 변환시키는 이유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잘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적 충동이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그저 충동에 따라서 사는 인간은 남에게도 또 스스로에게도 위험하다.


원시인의 삶을 위협하는 최고의 불안은, (성적 욕구불만보다는) 자신을 집어삼키는 외부의 짐승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을 발견하고 잘 다룰 줄 알게 된 인간은, 위험한 동물들을 모조리 멸종시키지 않고도 서로 공존하며 잘 살아남았다. 자신의 관자놀이를 집게손가락으로 후벼 파는 사람의 불안은, (성적 욕구불만보다는) 자아를 집어삼킬 것처럼 느껴지는 자기 안의 '짐승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내적 현실을 인식하고 자기 영혼 속 불을 잘 다룰 줄 알게 된다면, 그도 내부의 '짐승들'과 공존하며 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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