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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mihr Sep 14. 2024

엄마가 처음 학교에 온 날

엄마는 원래 손이 컸다



살면서 딱 한 번, '전교 부회장'이라는 어마무시한 감투를 쓴 적이 있다. 여러 사람 앞에 서면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심약한 목소리는 더 기어들어가는 나로서는, '진심'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그즈음, 내 부탁을 받은 엄마가 처음으로, 학부모로서 학교에 왔었던 일만 생생하게 기억한다.


*


오래도록 소녀-가장이었던 엄마는, 이번에는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는 억척-엄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끊임없이 고되게 일하지만 '알뜰한' 살림살이 같은 건 익힐 새가 없던 억척-엄마와, 그의 세 딸들은 늘 가난했다. 그래도 딸들은 고생하는 엄마를 보며 일찍 철이 들어서, 웬만하면 각자 그냥 알아서 열심히 컸다.


다행히 학교 공부는 내 적성에 맞았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 우등생이 되면 보통, 학교생활이 편하다. 그런데 국민학교 6학년이던 그 해 담임선생은, 우리 반 우등생들을 하나씩 불러서 '엄마가  언제쯤 (봉투를 들고) 학교에 올 수 있는지' 끊임없이 체크했다.


다른 아이들의 엄마들은 모두 왔다 갔는지, 담임에게 불려 가고 있는 건 어느새 오직 나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나는 바쁘고 힘든 엄마한테 담임선생의 지시를 전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등생이라면 엄마가 (봉투를 들고) 학교에 오는 것쯤은 당연한 거라 믿는 선생에게, 바쁘고 힘든 엄마의 삶과 나의 구차한 형편에 대해서도 알리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느 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나 보다.


심약한 딸 : "엄마! 선생님이 학교에 좀 오래."

우렁찬 엄마 : "왜?"

심약한 딸 " : "음.... 나도 몰라~"

우렁찬 엄마 : "흠.... 그래? 내일 갈게, 걱정 마!"   

심약한 딸 : (??!!??)


나는 '걱정된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내게 무엇을 '걱정 말라'라고 하는 걸까. 어쨌든 다음 날 수업 시간 내내 나는, 엄마가 언제 오려나 기다렸다. 그러나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엄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 담임에게 불려 가겠구나, 체념하면서 나는 주섬주섬 책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교실 밖 복도에서 매우 낯익은 아주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렁찬 엄마 : 아이참, 선생님들 고생하시는 데 회식 좀 하셔야지요~! 으하하하~

교장 선생님 : 오늘 XX 어머님 덕분에, 선생님들이 아주 신바람들이 났습니다, 어허허허~

담임 선생님 : (복도로 달려 나가며) 아이고, XX 어머님이 참 호탕하시네요, 에헤헤헤~


*


조용히 봉투 하나만 건네면 끝날 일을, 엄마는 봉투 다발을 뿌려서 학교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전교생이 모여 선 학교 운동장에서, 높은 조회대에 올라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전교 부회장 임명장을 받았다. 뒤돌아 조회대를 내려오는 내내, 번뜩이는 천 개의 눈이 나를 향해 빛을 쏘아댔다. 그때 나는, 엄마의 손 사이즈에 무지했던 나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면서, 굳게 결심했다.


'이제 누군가 아무리~ 나를 괴롭힌대도, 엄마에게는 결~코, 아무 말 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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