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원문 - 강조표시는 롤랑 바르트)
Il y a deux affirmations de l'amour.
Tout d'abord, lorsque l'amoureux rencontre l'autre, il y a affirmations immédiate ( psychologiquement : éblouissement, enthousiasme, exaltation, projection folle d'un avenir comblé : je suis dévoré par le désir, l'implusion d'être heureux) : je dis oui à tout (en m'aveuglant). Suit un long tunnel : mon premièr oui est rongé de doubtes, la valeur amoureuse est sans cesse menacée de dépréciation : c'est le moment de la passion triste, la montée du ressentiment et de l'oblation.
De ce tunnel, cependant, je puis sortir ; je puis «surmonter», sans liquider; ce que j'ai affirmé une première fois, je puis de nouveau l'affirmer, sans le répéter, car alors, ce que j'affirme, c'est l'affirmation, non sa contingence : j'affirme la première rencontre dans sa différence, je veux son retour, non sa répétition. je dis à l'autre (ancien ou nouveau) : Recommençons.
(해석)
사랑에 대한 두 개의 긍정이 있다.
우선, 사랑의 대상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즉각적인 긍정. (심리학적으로 말자하면 황홀함, 환희, 찬양 그리고 충만한 미래에 대한 분별없는 예측 : 욕망과 행복에 대한 충동이 나를 뜯어먹는다.) : 나는 무조건 '좋아'라고 말한다. (눈이 먼채로) 이런 긴 터널을 따르면서 : 나의 첫번째 '좋아'는 의심으로 잠식당하고, 사랑의 가치는 끊임없이 가치절하될 위험에 처한다. 그 때가 바로 슬픈 수난, 원한과 희생제의가 솟구친 순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터널로부터 나갈 수 있다 ; 나는 청산(해결)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 ; 내가 처음 했던 긍정, 그것을 나는 새롭게 긍정할 수 있다.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롭게) 긍정하는 것은 (더이상) 우연성이 아닌 긍정이기에 : 나는 맨 처음의 (우연한) 마주침을 그 차이 안에서 긍정하는데, 내가 바라는 것은 처음으로의 회귀이지, 반복이 아니다! 나는 (오래되거나 혹은 새로운) 사랑의 대상에게 말한다 : 다시 시작합시다!
(단어)
* rencontrer 1.(우연히) 마주치다 2.(약속하여) 회견하다 3.(처음으로) 알게되다 4.발견, 충돌하다
* immédiate 보통 '즉각적인'이라 번역하지만, média(매개)가 없다(im)는 게 본래의 의미다.
* passion 열정으로 번역되지만, 이 역시 passer(지나가다, 관통하다)가 어원이다. 그래서 내 몸을 관통해 지나가는 것, '수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예) souffrir mort et passion 지독한 고통을 당하다, semaine de la Passion 수난 주간 (부활절 전)
* oblation 신에게 바침, (가톨릭 미사) 봉헌
* monter 뭔가가 위로 솟아 오르는 형상이다. 그런데 surmonter(극복하다)는 monter보다 더 위에(sur) 있는 형상이랄까. 그러니 '솟구친'(montée) 원한감정과 희생제의의 순간에 그 위로(sur) 올라간다(monter)는 롤랑 바르트의 표현이 더 재밌다.
* retour 회귀(다시 돌아옴)와 répétition 반복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단락이 니체의 긍정을 해석하는 들뢰즈를 인용하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내가 아직 읽지 못한) 들뢰즈의 책 제목 [차이와 반복]이 떠오른다. 반복 속에서 '차이'가 생성된다면, 그것이 바로 (아무런 편견없이 그저 매력적이던) 맨 처음으로 회귀하는 것일까, 지금은 추측만 해본다.
(5줄 단상)
어릴 적 친구들과 즐겨하던, '뱀 주사위 놀이'. 맨 아래 출발지점에 각자의 말을 놓고, 윷놀이처럼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수만큼 앞으로 간다. 운 좋게 사다리칸에 걸리면 순식간에 위로 올라가지만, '뱀' 칸에 걸리면 기껏 나아온 길을 돌아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다른 친구보다 먼저 가기는, 이제 영 글러버린 것이다. 그래도 먼저 도착한 친구가 그저 구경만 하는 동안에, 나는 나락부터 다시 기어 오르기 시작하고 있으니 놀기로만 따지면, 내가 더 많이 노는 셈 아닌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놀기 위해서 놀듯, 살기 위해 살고, 사랑하기 위해서만 사랑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