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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Apr 12. 2024

필립 파레노: 대화로 빚어낸 목소리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국내 최초 대규모 개인전

예술에 대한 혁신적이고 획기적인 접근 방식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미술가로도 손꼽히는 필립 파레노의 서베이 전시가 리움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 초기작부터 2024년 제작된 신작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국내 최초 대규모 개인전으로 총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리움미술관 개관 이래 블랙박스는 물론, M2 지하 1층 및 1층, 로비에 이르는 전 공간을 단일 현대 미술가에게 내어준 첫 전시로도 화제가 되었다.


막(膜), 2024, 콘크리트, 금속, 플렉시글라스, LED, 센서, 모터, 마이크, 스피커, 1360 x 112.7 x 112.7 cm, 작가 및 리움미술관 제공 © 필립 파레노


오랫동안 미술관의 야외 데크를 지키던 아니쉬 카푸어 작품이 있던 자리에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 신작 <막(膜)>(2024)이 들어섰다. 유기적으로 숨 쉬는 듯한 타워에 귀 기울이면, 외계어를 방불케 하는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센서 기능이 탑재된 이 기계 탑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지 능력으로 땅의 움직임을 느끼고, 기온, 습도, 풍량 등 지상의 환경 요소를 수집하고 이를 미술관 내부에 흘려보낸다. 동물은 감각적으로 느끼지만, 기술과 사회에 의존하게 된 인간이 쉽사리 느끼지 못하는 자연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파수이자 새롭게 탄생한 언어인 <∂A>(2024) 델타에이를 통해 하나의 몸체처럼, 전시 전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델타에이(∂A)의 소리는 배우 배두나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그녀의 목소리 운율을 활용해 인공지능에 의해 창조한 가상의 목소리로 공간 곳곳에서 공명한다. 전시의 주축이 되는 작품의 발화된 목소리는 통신의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감각하고 사고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필립 파레노의 다른 작품들과 어우러져 공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전시 전경, ⓒ Philippe Parreno, 제공: 리움미술관, 촬영: 이현준


1964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필립 파레노는 프랑스를 본거지 삼아 세계를 무대로 영상, 조각, 설치, 그래픽 포스터, 사진 등 매체를 아우르는 작업을 전개한다. 그는 전통적 관념을 비롯해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을 거듭할 뿐만 아니라, 협업을 기반으로 매체 간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면서 오늘날 현대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전통적인 방법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작가는 끊임없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을 꾀하기도 하면서 작품과 전시, 그리고 관람객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을 지속해 왔다. 영상,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동시에, 시간, 임시성, 나아가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을 관여시키고, 환경 데이터, 자연과도 상호작용한다.


이번 개인전이 특별한 이유는 개별 작품을 집결한 것에서 나아가 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구현한 데 있다. 야외 데크를 거쳐 로비로 들어가면 빛을 반사하는 평면거울 장치의 원리를 활용한 <일광반사경>이 조명부터 습도, 온도까지 모두 철저히 제어되는 미술관 환경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움직이는 빛을 부여하고, 이 객체를 통해 태양을 가져오고자 시도한다.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2022 헬륨, 마일라 풍선 가변크기 작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제공 © 필립 파레노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홍철기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서로 다른 분위기를 지닌 4가지 공간이 각각의 색깔을 테마로 전개된다. 작가가 오렌지룸이라 일컫는 M2 1층 공간을 전반적으로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작품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은 미술관 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는 것에 착안해 이곳에 배치했다. 태양이 사라지고 멸망한 세상에 남겨진 생존자들이 땅 밑으로 들어가 유토피아를 구축하고자 한 내용의 1896년 발간 공상과학 소설을 인용한 것이다. 한 세기를 훌쩍 넘어 과거로 거슬러 간 소설에서 모티프를 얻었지만, 오늘날 끊이지 않는 전쟁과 질병, 기후 위기로 위기에 처한 지구의 현주소를 암시하며, 해 질 녘 석양빛에서 당연시해 온 일상의 시간과 환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제안한다. 2000년대 작업이 모여 있는 오렌지 룸에는 이외에도 제한된 공간 속 부유하는 물고기들과 관람객이 서로를 관조하는 듯한 <내 방은 또 다른 어항>과 연주자 없이 자동으로 연주하는 피아노 위에 살포시 떨어지는 주황빛 인공 눈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름 없는 한 해>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파란색 카펫과 파란색을 연상시키는 사운드 너머 펼쳐지는 블루룸(M2 2층)은 회고적인 성격을 지닌 공간으로 파레노가 초기부터 협업해 온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이 제작한 포스터와 여기서 파생된 벽지 등을 비롯해 작가의 오랜 동료 작가인 피에르 위그의 참여가 더해져 디자인한 가구와 조명도 전시된다. 흔치 않은 재료인 블랙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계단을 오르면 마치 공중에 부유하듯 미래적인 공간을 자아내는 건축가 렘 콜하스의 블랙박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자화상을 그린듯한 <마릴린>, 고야의 “검은” 회화 시리즈에서 착안한 <귀머거리의 집> 등 총 3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차양 연작, 2016-2023 플렉시글라스, 전구, 네온 튜브, DMX 제어기 가변크기 작가 및 리움미술관 제공 © 필립 파레노 사진: 홍철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운이 좋으면, 현대미술가 티노 세갈의 인간을 매개체로 표현한 상황을 함께 할 수 있다) 마지막 공간으로 내려가게 되면 무채색의 키네틱한 무대가 펼쳐지며, 전시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모든 것이 서로 연동되고, 사운드와 빛, 기계가 하나 되어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움직인다. 극장 입구의 화려한 불빛 차양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가의 대표적인 연작 <차양>이 신작 <막(膜)>과 연결되어 야외 환경 조건에 따라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만화에서 인물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그려 넣는 <말풍선>은 어떤 단어도 담지 않은 채 무중력 상태가 되어 둥둥 떠다닌다. 관람객이 작품을 마주하며 느끼고 표현하는 문자가 어느새 말풍선으로 표류하며 장관을 이루는 광경 너머로 언어의 의미와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저는 항상 예술 작품을 만들 때 이건 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 필립 파레노


지난 2월 28일 리움에서 개최된 작가와의 대화에서 “공간과 시간에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밝힌 파레노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의견, 생각을 교환하는 목소리에 주목한다. 작가는 항상 질문하고, 생각한다. 때로는 협업자들과 함께 갤러리 공간을 변형시키고, 예술과 건축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동적 환경으로 만드는가 하면, 빛, 소리, 공간에 변주를 주고, 관객의 감각과 인식을 자극한다. 예술은 대화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라 덧붙인 파레노는 어떤 형태를 만들 때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한 프로세스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스스로와의 대화는 머릿속에 머물던 아이디어, 가상의 것을 시각적으로 현실화하는 기반이 된다.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전시 전경, ⓒ Philippe Parreno, 제공: 리움미술관, 촬영: 이현준


내면의 목소리, 협업자와 나눈 대화, 인공지능의 언어가 두루 모여 여러 목소리를 내는 전시를 보며, 어쩌면 이내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수많은 궁금증이 떠오르더라도 걱정하지 말자. 예술은 소통 없이 그저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다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가 여전히 미완으로 여기는 작품들도 “사물(작품) 간의 소통”을 바라보던 관람객이 새로운 의구심, 혹은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다면, 이미 작가와 가상의 대화에 돌입한 것일 테니 말이다.


장소 리움미술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기간 2024.02.28 - 2024.07.07


엘르 코리아 닷컴 #요즘전시 칼럼(2024.04.01 게재)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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