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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May 03. 2024

여성 예술가 다시 보기

보이는 객체, 그리는 대상에 머물던 여성을 미술사의 주체로 다시 세우다

전 세계 미술 학도에게 미술사의 <성문영어> 또는 <수학의 정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고전이 있다. E.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다. 그런데 미의 여신 비너스,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다수의 여성을 담아낸 명작이 등장하는 이 책의 초판에서 여성 미술가는 단 한 명도 언급하지 않는다. 선사시대 동굴벽화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주제를 넘나들지만, 편협하게 제도화된 남성 중심 미술사에서 여성은 보이는 객체, 그리는 대상으로만 다뤄왔다. 인본주의를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에 여성 미술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교화나 나체화를 그리지 못하는 등 소재 선택에 제약이 있었고,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사회는 여성 미술가에게 여성스러운 스타일과 적당한 아마추어 수준을 요구했다. 여성이 표현 대상을 넘어 스스로 본질을 정의하고 본격적으로 주체로 거듭나는 데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베트남전 반대 학생 시위에 의해 촉발된 문화혁명인 68운동이 기폭제가 되었다. 68운동이 몰고 온 파장에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도 포함되었고, 페미니즘의 물결이 예술에 자연스럽게 흘러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럽 대륙 너머 미국에도 이러한 물결은 당도했다. 1971년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라는 아티클을 〈아트뉴스(ARTnews)〉에 게재해 파문을 일으켰고,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작품에 표현하며 남성 중심 사고에 정면으로 대항한 작가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는 “모든 여성 미술가는 여성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을 자신의 첫 번째 투쟁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주류 서양미술사에 포함되지 못한 ‘위대한’ 여성 미술가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창조 도시 런던이 이러한 여풍 대열에 앞장서고 있다.


Yoko Ono with Half-A-Room 1967 from HALF-A-WIND SHOW, Lisson Gallery, London, 1967 Photo ©Clay Perry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이 발표한 2024년 전시 목록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 감지된다. 2월 15일 공개한 오노 요코의 대규모 회고전 <Yoko Ono: Music of the Mind>는 참여적 성격의 초기 개념 작품부터 퍼포먼스, 악보, 설치, 영화를 아우르는 작품 200여 점을 모은 대규모 전시다. 이어서 여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시각 운동가 자넬레 무홀리(Zanele Muholi)의 사진전이 시작된다. 성소수자의 권리 증진과 사회적 가시화를 위해 행동해 온 작가는 자국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차별과 증오에 주목해 아름다운 저항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무홀리가 작품 활동 전반에 걸쳐 주요하게 다뤄온 흑인,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삶을 기록한 시리즈도 포함한다.


Zanele Muholi, Ntozakhe II (Parktown), 2016. Courtesy of the Artist and Yancey Richardson, New York


작년 11월부터 1970~1990년대 여성 예술가 운동을 조망하는 그룹전 〈Women in Revolt!〉를 개최 중인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은 아예 작정한 모양새다. 100명이 넘는 여성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 전편에 이어 5월부터 〈Now You See Us: Women Artists in Britain 1520-1920〉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 이전의 미술사에서 잊힌 여성 작가를 대거 소환한다. 1520년부터 1920년 사이 영국에서 활동한 여성 작가의 여정을 야심 차게 기록, 영국 미술계에서 여성이 전문 작가로 인정받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본다. 더불어 살아생전 눈에 띄는 작품 활동을 펼쳤음에도 사회적 기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소외된 여성 미술가를 재조명하고, 오랜 세월 익숙해진 고정관념과 인식을 깨고 독특한 시각 경험을 전달하는 작품을 폭넓게 전시한다.


Angelica Kauffman R.A, Colour, 1778~1780.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024년 여름 파빌리온 작가로 조민석 건축가를 초대해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는 2월 바버라 크루거 개인전 〈Barbara Kruger: Thinking of You, I Mean Me. I Mean You〉를 개막했다. 작가가 런던에서 20여 년 만에 선보이는 장소 특정적 전시다. 매거진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초기 경력에서 비롯한 광고 미학을 차용해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를 전개하는 작가는 소비주의, 젠더, 권력과 자본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Untitled(I Shop therefore I Am)’(1987/2019), ‘Untitled(Your Body Is a Battleground)’(1989/2019) 같은 걸출한 ‘잠언’으로 1980년대 말 미술계를 뒤흔든 작가의 대표작을 영상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 발견한 이미지(found image), 밈(meme), 셀피에 이르는 온라인 소비 콘텐츠를 소재로 한 3채널 영상 설치 작품 ‘Untitled(No Comment)’(2020) 등 신작도 만날 수 있다.


Barbara Kruger, Untitled (Remember Me), Single-channel Video on LED Panel, Sound, 1988/2020 (Stills)


여성이라는 젠더를 앞세우는 자체를 역차별이라며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작품 속 대상으로만 등장하거나 작가라 해도 역사에서 지워지고 존재감 없이 묻혀 있던 시간, 또 그 사실을 새삼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작품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한 대화를 이끌어내고,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제시해 온 여성 미술가를 대대적으로 조명하는 전시가 미래의 남녀 미술가에게 보다 자유로운 표현을 위한 발판이 되고,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Artnow Issue 45 (Spring 2024) CITY NOW LONDON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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