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때론 단순히 기록하는 매체를 넘어선다
18세기 초 기술산업의 결과물로 탄생한 사진은 오늘날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관람객 발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다다른 사진가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현실을 포착하고, 나아가 시각과 생각을 싣는다. 사진은 때론 단순히 기록하는 매체를 넘어, 역사를 보존하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고 다양한 시대상에 대한 인식을 넓히며 개인의 삶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진은 또 지극히 사적이고 회화적인 시선으로 풍경과 도시의 서사를 그려낸다. 올여름, 사진의 다채로운 매력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단 하나의 전시, <컨페션 투 디 어스(Confession to the Earth)>
6월 12일 오전 8시 27분, 많은 시민을 화들짝 놀라게 한 재난 경보가 연달아 요란스럽게 울리며 아침을 깨웠다. 지진이 극히 드문 호남 내륙을 강타하며 올해 국내 최대 규모 지진으로 등극한 전북 부안군발 지진 경보다. 등교 시간과도 맞물려, 부안의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등 소동과 혼란이 이어졌다. 보물로 지정된 내소사 대웅보전이 훼손되고 피해 사례가 연달아 접수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집계되었으나 자칫 아찔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기후변화의 진위를 두고 논쟁을 벌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지구 행성에 사는 그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매일 매 순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 기후의 느낌을 피부로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럴까 저럴까 머리를 굴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뜨거워져야 할 때가 되었다." – 최재천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2023년, 인류는 산업화 이래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를 맞이했다. 온난화 시대를 지나 지구가 펄펄 끓는 열대화 시대에 진입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올 2월, 네이처지는 이르면 2050년경에 아마존 열대우림 생태계의 복원이 불가능해진다고 발표했다. 이미 매해 한국 인구 40%에 달하는 이천만여 명이 기후 변화로 인해 강제 실향민, 즉 ‘기후 난민’으로 내몰리고 있다.
땅과 하늘을 넘나들며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가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기후환경을 주제로 앞세운 전시가 충무아트센터 내 재개관한 갤러리 신당에서 개최 중이다. 한국, 독일, 미국, 영국 출신의 사진가 5명이 전하는 “지구를 향한 고백”은 세계 기후 붕괴의 심각성에 공감하며 사진을 매개로 환경 변화에 직면한 인류에게 공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기획됐다.
300평 대규모 공간을 메운 작품 100여 점을 공개한 이번 전시는 제목 그대로 우리 별 지구에 바치는 고백이자 고해성사와 같다. 5인의 작가는 환경 변화로 평생 살던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과 구호가 필요한 멸종 위기의 동물들,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와 쓰레기, 그런데도 여전히 개발에 열중하는 인간의 탐욕, 소멸과 생존에 대해 각자의 사진 언어로 이야기한다. 환경을 저버린 무관심과 무감각에 보내는 재난경보이자, 사진을 통해 진솔한 깨달음 속 공존을 위한 작은 날갯짓이 모여 큰 물결을 일으켜 일렁이듯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희망의 마음을 담았다.
닉 브랜트(Nick Brandt)는 사이클론, 가뭄 등으로 일상이 산산이 부서져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동물을 담는 ‘The Day May Break’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기후 파괴에 가장 책임이 적은 나라에 속하는 짐바브웨, 케냐, 볼리비아, 피지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맨디 바커(Mandy Barker)는 지구 표면 70%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에 표류하는 플라스틱 잔해를 회수해 촬영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작업 연작을 출품했다. 톰 헤겐(Tom Hegen)은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서부터 가장 어두운 심해의 해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남지 않음에 착안해, 항공사진 형식으로 찍은 ‘인류가 빚어낸 추상’을 선보였다. 5인의 작가 중 유일한 한국인인 이대성 작가는 전통적인 몽골식 삶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유목민들과 가축의 모습에 상상력을 가미했다. 급격한 사막화로 변해버린 몽골의 풍경을 마치 박물관에 재현된 전시 공간처럼 구현하고 ‘미래의 고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불어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해 차차 사라져가는 섬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인도 고라마라 섬 주민들의 초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잉마리 비욘 놀팅(Ingmar Björn Nolting)은 독일의 탄광 마을 뤼체라트 주민 강제퇴거에 반해 마을을 점거한 환경운동가들의 치열한 노력과 이를 저지하는 에너지 회사와의 충돌을 꾸밈없이 보여줬다.
전 세계 대륙과 바다, 하늘에서 기록한 작품들은 아름다워서 더욱 위태롭고 섬뜩하다. 전시를 기획한 석재현 예술감독은 전시 서문에서 “고백은 언제나 힘겹다. 그 고백의 대상이 생존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재난이 우리를 침몰시키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고 말하며, 눈앞에 닥친 재앙으로 상처투성이인 지구를 위해 작금의 실천과 변화를 촉구한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길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있다”고 말이다.
장소 충무아트센터 갤러리 신당 (서울 중구 퇴계로 387)
기간 2024.04.18 - 2024.09.08
성곡미술관 <프랑스현대사진> 기획전
사진 탄생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동시대 사진에 주목한 기획전이 서울 성곡미술관에 상륙했다. 19세기 기계 문명의 총아로 산업화를 주도한 사진술은 ‘기술적 진보에 예술적 허식’을 덧댄 이미지로 조롱당하기도 하고, 어두운 암실에 탄생한 이미지에 반한 예술가들이 빛을 찾아 실외로 나가면서 인상주의 회화 탄생 배경에도 일조했다. 오늘날 여전히 예술과 기술 사이를 오가는 사진의 시작과 끝을 목도한 프랑스 예술가 22인의 작품 86점이 한국을 찾았다. 파리 <포토 데이즈> 설립자 엠마뉘엘 드 레코테(Emmanuelle de l’Ecotais) 디렉터가 이번 전시의 공동 기획자로 참여해 현대 프랑스 사진계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전시는 자연, 정물, 인간, 공간이라는 고전적인 테마 네 가지를 통해 예술로서의 사진과 이를 인식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를 현대 프랑스 작가들이 어떻게 새롭게 재해석하고 변주해 나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지구 생태계의 파괴는 프랑스 예술 창작가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머나먼 기원을 연상시키는 동굴, 돌, 식물, 심해와 같이 정물과 풍경을 넘나드는 작가의 작업 소재에서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 미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정물 섹션에서는 17세기 후반부터 이어져오는 정물화 장르를 재해석해 평범한 일상 사물이 지닌 매력과 인간을 잇는 작품을 두루 보여준다.
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표현 방식을 실험하고,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도 등장한다. 전시 초입부에 소개되는 브로드벡과 드 바르뷔아(Brodbeck & de Barbuat)가 만들어낸 <평행의 역사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의 세 점의 작품은 인공지능 미드저니를 사용해 프롬프트로 전달된 기술 데이터로부터 가상으로 사진의 역사를 재현해 냈다. 만 레이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학습시킨 뒤 AI에게 새로 그려보라고 지시하자, 무릎뼈가 부자연스럽게 돌출되거나 손가락이 6개인 인물을 그려낸다. 익숙한 동시에 기묘하고 어색한 결과물이다. 최근에 숨 가쁘게 이루어진 기술 발전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공간’을 다룬 섹션은 가상, 현실, 상상이 중첩된 새로운 세계를 제시해 시공간을 초월해 떠나는 여행으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사진의 발전과 맥을 나란히 한 영상 작품 세 점도 만나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로랑 그라소(Laurent Grasso)의 <인공>은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의 첫 선 이후 성곡미술관에서 두 번째로 보여지는 것이라 더욱 반갑다. 다양한 힘이 인간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매료된 작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드론, 초분광 카메라, 라이다 스캐너, 3D 현미경 등의 최첨단 관찰 도구를 사용 삼아 탐험의 개념에 의문을 던진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이번 전시는 고전적인 촬영 기법과 인화 기술을 작업에 사용하면서도 현대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현대사진의 역동성을 생동감 있게 조명한다.
장소 성곡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경희궁길 42)
기간 2024.05.30 - 2024.08.18
이현준 개인전 <City Epics>
패션계와 미술계를 가로지르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 중인 사진가 이현준이 전 세계 도시를 여행하며 촬영한 25점의 신작을 전시한다. <City Epics> 개인전에 등장하는 도시는 서울부터 베를린, 빌바오, 암스테르담, 홍콩, 치앙마이, 런던, 프라하, 뉴욕 등 다양하다. 하지만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인물을 최대한 배제하며 건축물을 자로 잰 듯 안정감 있게 잡아내 회화적으로 그린 도시의 초상은 어딘지 서로 닮아 있다.
혹자는 이현준 사진가의 정교하게 정제된 작품 세계의 이면이 유학시절 이방인으로서 느꼈던 속박감이나 무기력함을 카메라 프레임 속에서 완벽히 통제하며 비로소 얻은 해방감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선은 도시에 겹겹이 쌓인 건물들의 질감, 그 위에 드리운 빛과 어둠에 머문다.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고 공명하는 도시 구석구석에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작가가 섬세하게 채집하고 덧댄 도시의 서사를 가만히 마주하다 보면 “여행의 행선지는 장소가 아닌 사물을 새롭게 보는 방식('One's destination is never a place, but a new way of seeing things)”이라던 소설가 헨리 밀러(Henry Miller)의 말이 떠오른다. 가끔씩은 휴대폰 화면이 아닌 도시 풍경을 나만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며 매일매일의 일상을 ‘여행의 행선지’로 삼으면 어떨까.
장소 갤러리 9.5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53 안테룸서울호텔 지하 2층)
기간 2024.06.05 - 2024.06.30
엘르 코리아 닷컴 #요즘전시 칼럼(2024.06.14 게재)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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