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패션의 동행, 그 기나긴 여정
하루가 다르게 극변하는 현대 소비사회는 경쟁을 부추긴다. 단순 물질 소비보다 부가가치, 서비스, 나아가 경험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태세를 갖춘 소비자가 전 세계적으로 많아지면서, 정보 과부하라는 바다와 선택 피로의 파도 사이를 너울거리며 항해하는 글로벌 패션 기업은 고객에게 다다르고 인상을 남기기 위한 전략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아트 마케팅을 다방면에서 펼치고 있다.
예술과 패션의 동행, 그 기나긴 여정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패션을 일컬어 “생활에서 드러나는 멋과 사회 교류로 예술을 실현하려는 시도(attempt to realize art in living forms and social intercourse)”라고 정의했다. 근대 철학의 선두에서 과학혁명을 이끈 이의 이 같은 발언은 예술과 디자인, 건축·기술이 융합되는 크로스오버 문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공명한다. 예술과 패션은 형태, 패턴, 문양과 질감, 컬러 팔레트를 활용한 시각적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시대를 초월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라이프스타일, 대중문화 발전에도 기여해 왔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과 패션이 인본주의와 고전 문화 부흥을 꾀했다면, 여성의 참정권 획득 등으로 사회적 역할이 급변한 20세기 초에는 새로운 이념을 탐구하는 실험정신을 중시하는 당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은 아방가르드 패션과 예술로 이어졌다.
패션과 텍스타일을 사랑했던 프랑스 예술가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의 대담한 색상과 생동감 넘치는 패턴은 동시대 활동하던 코코 샤넬(Coco Chancel), 폴 포아레(Paul Poiret) 같은 패션 디자이너는 물론,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 등 후세 디자이너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환상적인 모티프와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의 아방가르드 디자인이 한데 만나 “랍스터 드레스”가 세상에 선보여졌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았던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은 자신의 이름을 건 메종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몬드리안(Mondrian)의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연상시키는 칵테일 드레스를 디자인하며 추상미술의 선구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명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ready-to-wear)’로 불리는 YSL 기성복 출시 두 해 전인 1965년 애 발표해 패션과 예술의 조우가 빚은 새로운 아이콘의 탄생을 알린 드레스는 단순한 컷, 기하학적인 선, 대담한 색상으로 컬렉션에 모던한 느낌을 부여하며 화제 면에서도,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럭셔리 패션: “꿈의 실현”을 선사하다
예술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던 패션이 본격적으로 “예술을 실현”하려는 시도를 공공연히 한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소비의 문화인류학과 밀접히 연결된다. 패션과 럭셔리는 더 이상 부유층 기반의 특정 '유형'만을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초고액순자산(UHNW)’ 고객의 구매행동이 완벽을 기하는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품질, 오랜 세월 대대로 이어온 가치에 의해 여전히 좌우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국경과 문화적 경계를 넘어 럭셔리는 소수의 “특수계층이 누리는 일상(the ordinary for extraordinary people)”의 경계를 벗어나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순간(the extraordinary for ordinary people)”으로 노선을 전환해 신흥 시장으로 확장해 나갔고, 이는 고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오뜨 꾸뛰르 디자이너가 예술 작품에서 감화되어, 특정 색상이나 패턴을 차용한 것이 20세기 초중반 패션·예술 협업의 주를 이뤘다면, 21세기 협업은 창의적인 제품 디자인부터 매장 내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보다 친밀하면서도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세계를 무대로 뻗어 나가려는 다국적 기업에게 국경 없는 언어인 예술은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거듭났다.
1980년대 들어서는 럭셔리 그룹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유서 깊은 하우스를 인수한 기업가들은 수익 개선에 나섰고 그룹에 합류하지 못한 일부 오뜨 꾸뛰르 메종 중에는 서서히 광택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LVMH) 그룹의 CEO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는 1999년 12월, 새천년을 앞두고 발간된 WWD와의 인터뷰에서 “창의성을 수익성으로 전환시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What I like is the idea of transforming creativity into profitability)”고 밝혔다. 이는 다가올 21세기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고, 세계 최고 부자 대열에 등극한 그의 이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고 내렸다. 예술과 비즈니스 세계의 교차점은 이 같은 철학으로 제품의 위상을 높이려는 럭셔리 그룹의 야심 찬 노력과도 연관이 깊다. 예술과의 연계로 한층 고상하고 익스클루시브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혁신을 좇았다. 세계화된 사회, 글로벌 경제의 급속한 변화가 예술과 접목한 마케팅의 효과를 드높였다. 여기에 인터넷 보급만큼이나 큰 파급력을 지닌 소셜미디어의 도래도 한몫했다. 예술이 깃든 콘텐츠를 다채로운 채널에 소개해 고객과 브랜드를 더욱 긴밀히 연계시키는 아트 마케팅 기법은 고객의 감성에 접근하는 감각적인 방법으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 없이 경제를 생각할 수 없다”는 프랑스 문명평론가 기 소르망(Guy Sorman)의 주장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아트 마케팅을 일회성 문화예술 후원이 아닌 브랜드 차별화를 위한 투자로 여기는 기업도 차차 늘어났다. 특히 일상 사물을 오브제로 적극 활용하는 현대미술의 대두와 더불어, 예술과 비즈니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더욱 빈번하고 정교해졌으며,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각각 선보여진 루이 비통 아트 콜라보레이션 핸드백은 런던에서는 디자인, 뉴욕에서는 예술 작품으로 전시되며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마케팅의 행보에 유의미한 질문을 던졌다.
아트 마케팅, 그 이면에 숨은 전략
아트 마케팅은 단순히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나아가 미디어 포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바꿔 놓았다. 시장 확장으로 인해 더 이상 럭셔리는 진정한 “독점” 제품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게 되었다.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늘 더욱 높은 곳을 추구하는 럭셔리의 본질은 브랜드 가치와 더불어 마진도 높게 유지한다는 양면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 후원부터 아트 마케팅에 이르는 예술과의 협업을 추구하게 되었다. 아트 마케팅은 전 세계 소비자에게 문화를 넘어 기업의 가치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 이르렀다.
럭셔리 시장 경쟁이 보다 치열해진 21세기 진입을 앞두고 일찌감치 1990년대부터 예술과의 협업을 이끌며, 트렌드를 주도해 온 루이 비통 사례를 살펴보자. 예술가의 창조성을 전적으로 지원할 뿐 아니라, 고객과의 소통에 감성적 요소를 불어넣으려는 경영진의 열망이 뒷받침된 루이 비통 아트 마케팅 돌풍의 시작은 1997년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의 영입과 함께 시작됐다. 뉴욕 기반의 젊고 트렌디한 아티스틱 디렉터는 하우스 첫 패션쇼를 이끌며, 가죽제품 제조사에 머물던 여행 예술의 선구자를 글로벌 럭셔리 패션 브랜드로 단숨에 변신시켰다. 이어서 출시된 시계와 보석을 비롯한 제품 카테고리 확장으로 루이 비통은 시장점유율을 넓히며 질적 성장을 견인하고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마크 제이콥스가 가져온 혁신의 새 바람은 잘 만들어졌지만, 오랫동안 변화가 없어 “지루하던” 가죽제품에도 어김없이 들이닥쳤다. 그는 스테판 스프라우스(Stephen Sprouse),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에 이르는 현대미술가와 협업해 클래식한 모노그램 로고를 재해석했다. 18세기 고객 맞춤형 스페셜 오더 제품을 뒤잇는 현대식 한정판 개념을 정착시켰다. 훗날 마크 제이콥스는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 디자인 대학 특강 중 루이 비통의 상징과도 같은 로고 위 그라피티라는 변주를 주는 디자인이 일부 경영진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고 실토했다. 이어서 “수익이 3억 달러를 넘기자 그들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다"고 덧붙여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마크 제이콥스는 예술 분야와의 성공적인 협업에 큰 공헌을 했지만, 이러한 성과는 비단 개인 능력과 자질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의 창의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계획과 추진력 뒤에는 최고 수준의 품질 기준에 대한 집착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혁신을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하던 이브 까셀(Yves Carcelle) 옛 브랜드 CEO를 필두로 한 기업 리더십의 대담하고도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풍부한 전통과 문화유산이 뒷받침되었음이 자명하다. 루이 비통 역사가 낳은 산물인 모노그램 로고가 없었다면 마크 제이콥스가 가방에 그 어떤 모던한 형식의 변형을 불어넣었더라도 우리가 기억하는 선풍적인 대성공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변덕스러운 고객을 매년 유치하기 어려운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예술을 통해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는 지름길과도 같다. 예술과의 협업에는 대대적인 언론 노출이 따랐고 끊임없는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이미 높은 브랜드 인지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대기자 명단은 마침내 가방을 손에 넣은 VIP들을 무척 기쁘게 할 만큼 길었고, 매장 직원은 한정 제품을 위해 매장을 방문한 수많은 고객을 응대해야 했으며, 이들은 종종 다른 제품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한정판으로 출시되는 아트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을 통해 브랜드는 높은 성장과 가격인상을 통해 스스로의 지위를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출시 당시 멀티컬러 스피디(Multicolore Speedy) 가방의 가격은 기존 모노그램 캔버스 동일 디자인보다 3배 이상 높았다. 같은 디자인이라도, 로고에 새겨진 93가지에 달하는 색상이 캔버스에 스크린 프린트되어 예술적 부가가치가 더해진 가방을 구매하며, 가격 격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방문객은 결코 많지 않았다.
이로써 루이 비통은 한정판의 고가 포지셔닝으로 얻은 수익보다 더 큰 수확을 얻게 된다. 바로 높은 가격대에 익숙해진 고객의 인식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루이 비통은 신흥 시장에 집중해 새로운 국가에 진출하고 시장점유율을 선점하고 확보해 왔지만, 공격적인 신규 시장 공략으로 인해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다소 희석되었다는 평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티스트와의 협업이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작용하여 기존 고객층을 루이 비통의 세계로 다시 불러들였다. 루이 비통과 무라카미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이 공개된 해, 최상급 가죽을 활용한 고급 제품 라인을 출시하며, 전에 볼 수 없었던 가격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은 많은 바를 시사한다.
메세나로 이어지는 패션과 예술의 조우
럭셔리 패션 하우스들은 협업의 범위를 매장 디스플레이, 쇼윈도 디자인 등 매장의 환경 영역으로도 확장해 나갔다. 2005년 10월, 루이 비통은 2년 가까이 리뉴얼 작업을 거쳐 샹젤리제 메종을 공개했다. 빛의 도시에 들어선 샹젤리제 메종은 매장 경험을 전에 없던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곳의 진정한 타겟층은 파리지앵이 아니었다. 샹젤리제 메종은 매해 프랑스의 수도를 찾는 수천만 명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꿈의 실현'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체험하도록 안내한다. 루이 비통의 첫 문화 전시공간이 에스파스가 들어선 샹젤리제 메종의 성공은 이내 서울을 비롯한 세계 주요 도시에도 브랜드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메종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플래그십 건축물의 화려한 외관과 함께 매장 영업시간 이후에도 만나볼 수 있는 쇼윈도에서의 협업을 논할 때 에르메스를 빼놓기 힘들다. 메종의 본국인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의뢰를 국한시키는 대신에 2006년부터 배영환·권오상·정연두·잭슨홍·길종상가을 비롯한 한국 출신 아티스트에게 국내 매장의 쇼윈도 작업을 수차례 맡겨왔다. 단순 제품 전시가 아닌 국가별 예술가의 창의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행보는 에르메스의 또 다른 문화예술 분야의 업적인 미술상(Missulsang)을 떠올리게 한다. 2000년 외국 기업 최초로 한국 미술계와 현대미술가를 지원해 문화예술계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취지로 출범해, 이름마저 한글 그대로 지었다. 국내 아티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해외 명품 브랜드가 현지 고객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한국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에르메스의 사례가 빛나는 이유는 바로 오랫동안 일관성 있게 한국 미술가들과 꾸준히 협업을 지속해 왔다는 점이다.
패션 기업, 21세기 예술 후원자로 거듭나다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과 아트 마케팅은 고객의 브랜드 인지도를 재설계할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 현장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더 많은 대중을 미술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인지도가 높은 다국적 기업의 만남은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낳고 신뢰도를 구축한다. 협업을 통해 예술가들은 전례 없는 수준의 창의성을 기업에 가져왔고, 기업은 전 세계 숨은 재능을 발굴하고 거장과 협업하며 때로는 이들의 미술 시장에서의 “가치”를 향상시켜주고 친밀감을 심어주었다.
2024년 5월, 럭셔리 패션과 예술의 동행은 현재 진행 중이다. 1일, 서울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개막한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는 까르띠에 컬렉션으로 불리는 소장품들과 아카이브 자료 약 300여 점을 한데 모아 까르띠에 스타일이 갖는 강력한 문화와 창조적 가치를 보여준다. 전시 디자인은 아티스트 스기모토 히로시가 공동 설립한 일본의 건축 회사 신소재연구소(New Material Laboratory Lab)에서 맡았고, 한국의 전통적인 직물인 '라(羅)'라는 섬유의 제작 방식을 복원해 활용하고자 온지음과 협업했다. 18일부터 27일까지는 에르메스의 장인기술의 정수를 만나볼 수 있는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Hermès In The Making)’ 전시가 잠실 롯데월드타워 잔디광장에 상륙했고, 13일에는 구찌 2025 크루즈 패션가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Turbine Hall)을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1984년 이래 지난 40년간 현대미술재단을 운영해 온 까르띠에를 필두로 LVMH, 케어링(Kering) 등 럭셔리 대표 주자들이 각각 문화재단과 미술관을 설립하며, 상업과 비영리 영역의 경계까지 허물기에 이르렀다. 구찌 모기업 케어링 그룹이 운영하는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에서는 작가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카르트 블랑쉬를 한국 미술가 김수자에게 부여한 《흐르는 대로의 세상》 그룹전을,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는 2025년 리움미술관에도 순회가 예정된 피에르 위그의 《Liminal》 개인전을 만나볼 수 있다. 이들 21세기 예술 후원자들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이 더해진 메세나 활동을 통해 '지속 가능한' 아트 마케팅의 유기적 성장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최근 들어 팝업 레스토랑과 호텔을 짓고, 밀라노 가구박람회(Salone del Mobile) 기간에 신제품 가구를 출품하며, 올림픽을 후원하고,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앞다퉈 진출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럭셔리 브랜드. 예술과 패션 동행이라는 이 기나긴 여정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지 새삼 궁금해진다.
Public Art Issue 213 (June 2024) Fashion & Art Special Feature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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