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툴루즈 로트렉 ; 몽마르뜨의 별' 전시를 보았다. 석판화로 제작된 작품은 홍보를 위해 제작된 포스터와 공연장의 다양한 표정이 담긴 작품이었다. 공연장 모습이 상황을 알려주는 풍경이라면, 홍보용 포스터로 제작된 작품은 대상을 부각해 강열한 이미지를 전달하거나 비유적 표현으로 추측하게 하는 유머가 있었다.
작품은 사물의 배치와 형태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고 선과 색을 통해 더 강조한다. 작품은 강한 전달력을 지녔다. 배경색이 거의 없는 작품은 그 느낌이 화려하지 않지만 뚜렷한 기억을 가지게 만든다. 작품 속 사물 일부분에 색을 입히거나 선을 통해 부각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작품 전체에 색을 입힌 것보다 의미의 전달력은 더 강한 느낌이다. 특히 사물의 윤곽을 전체가 아닌 부분을 제거하거나 드러냄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판화만이 지닌 그 면과 선의 흐름이 주는 뚜렷하거나 흐린 영상 같은 표현이 재미있었다. 판화는 일반 회화와 다른 또 다른 매력을 지녔다. 판화 작품만 전시되는 경우가 적어서 그렇지 전시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전시장 풍경 2024.12.18
아래 글은 수년 전에 블로그에 썼던 것을 옮겨놓았다.
1.
판화 하면 떠오르는 것이 적은 비용으로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이 귀하거나 가격이 높아 직접 소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매우 유용하다. 좋은 작품은 판화라 할지라도 마음의 안식을 준다. 진품을 통해 얻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 일부를 간직하고 볼 수 있는 기쁨을 제공한다.
판화의 매력은 찍어내고 덧붙인 작가의 정성과 노력, 그 기법에 의해 일반 회화작품과는 또 다른 멋을 지니고 있다. 작가의 노력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 매력은 공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판화가 주는 매력은 역시 매끄러움이다. 덧칠한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빠진 몸매에서 풍기는 특성은 어느 것도 따라 할 수 없다.
다만, 판화작품과 일반 화화작품을인쇄물로 대량찍어 낸 것과는 분명 구분이 필요하다. 판화도 처음엔 대량 인쇄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탄생했지만 회화작품처럼 많은 손이 가고 정성 들인 작품이다. 더욱이 하나의 작품만 존재하는 Monoprint 작품이 수백 장의 인쇄물과 같이 취급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
판화에서만 볼 수 있는 거친 느낌,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선, 흑백 단일 색으로 나타내는 강열함이 좋다. 작가 손에 의해 하나씩 조각된 그 모습들은 삶의 굴곡을 디자인한 것이다. 파이고 드러난 그 형태 자체가 작품의 모든 것을 내포한다. 관객은 그 날카로운 능선을 타고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다.
어느 날 연필을 깎다가 베어진 손의 아픔을 목판화에서도 찾는 것이다. 나무 깊은 곳까지 그 결을 따라 날카로운 조각칼을 들이댈 수 있는 자신감 없이는 그 고통을 줄일 수 없다. 작가는 나무의 아픔까지도 삶까지도 이해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나뭇가지 하나에 드리운 그늘과 바람의 방향까지 그리고 돋아나는 잎새의 성장까지도 작품 속에서 숨 쉬는 것이다. 작가의 조각칼을 따라 나의 숨결이 움직인다. 마음 급하게 쫓아갈 수는 없다. 작가의 칼이 빗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수레를 따라가듯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수레바퀴 굴레에 맞추어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 수레가 도착할 때쯤 나는 작가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긴 시간 흐름을 감추려고 했는지 말이다. 어느 순간 드러날 그 모든 것을 위해 작가는 쉼 없이 고단한 여정을 이어온 것이다.
오늘 내가 본 이 작품 속 풍경은 지난 그 시간 속 하나를 가져온 것일 뿐이다. 조각칼에 의해 드러난 작품은 날카로움으로 그 대상을 표현하지만, 베이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날카로움은 작품을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할 뿐 관객에게 상처를 줄 칼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객이 날카롭게 직시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될 뿐이다.
검은 고무판에 조각도를 대고 인물을 새겨보던 초등학교 시절 추억이 판화라는 것을 처음 해본 경험이라면, 그것은 세상을 처음 알게 해 준 역사적 순간이다. 오늘 누군가 손을 통해 탄생된 작품을 보면서 판화가 가진 가치의 즐거움을 생각해 본다. 판화라는 그리움과 기쁨을 찾는다. 차가움과 부드러움이 교차하는 처음 만났던 조각칼 이미지는 아직도 모든 판화 속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추억이자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