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백 년 인사동 라인에 서다'전시회를 다녀왔다. 장욱진 탄생 백 년이 되는 해란다. 나는 장욱진이라는 화가를 모른다. 동굴 암각화 같고 동화 같은 그의 작품을 통해 장욱진이라는 화가의 이름을 알 뿐, 그리 깊이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회에 더 관심이 갔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동안 그에 대한 평론이나 서문도 읽어본 적이 없기에 처음으로 전시회를 통해 그의 작품을 직접 보았고 영상을 통해 그의 삶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전시회장에서 산 '강가의 아틀리에'라는 장욱진 그림 산문집을 읽고 있다. 첫 전시관을 보고 나서 그와 관련된 것들을 팔고 있어 가장 자신을 잘 말한다고 할 수 있는 산문집을 하나 샀다. 처음엔 그의 도록을 사는 것이 더 좋았으나 당일 인사동 여러 곳을 둘러보아야 했기에 무거운 도록을 포기하고 산문집을 샀다. 그의 모습을 대략이나마 좀 더 알 수 있을 듯싶다.
74년이라는 인생을 살다 간 그이지만 많은 것을 남겨놓고 떠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전시회장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아주 작은 소규모 작품이라는 데에 놀랐다. 그리고 영상을 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의 수수한 모습을 띠고 있어 더 놀랐다. 언 듯 그의 옆모습에서 무성 영화에 나오는 채플린의 모습을 보는 듯한 즐거움과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선한 인상이고 순수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은 그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작은 크기의 작품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그림은 가족과 풍경이지만 그 속에는 깊은 심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담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어른이면 결코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그것을 그대로 그러나 솎아내기를 통해 압축된 감정을 나타냈다. 거기에는 억지고 가식도 가감도 나눔도 없는 그의 눈에 비친 그대로가 아닌가 한다. 소위 어린아이의 장난기 어린 그림 같은 것에서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그림 속에 나타나는 집과 사람과 새가 어우러지고 나무가 있고 개울이 있는 듯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하는 감상에 잠시 빠져 볼뿐이다.
평생을 그림으로 살아온 그의 작품에서 무엇을 비교하고 그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은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보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 작품 속의 이야기가 바로 현실이라 하는 생각이 든다. 화면을 가득 채운 나무와 조그만 집에 그보다 더 작은 사람의 모습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어린아이의 눈에 나무는 거대한 숲과 같고 그 아래에 있는 집과 삶은 작은 존재일 뿐이었으리라.
작가는 서너 살의 그 동심을 평생의 화업畵業 동안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하지 않고서야 그러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더욱이 큰 캠퍼스가 아닌 작은 도화지에 그의 심상을 드러낸 것은 어쩌면 대작으로는 더 채울 수 없는 심상에 대한 자신의 절제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는 자연을 사랑했고 그 속에서 작품의 많은 것을 얻었다. 산과 개울, 새와 꽃, 밤하늘과 침묵,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그에게는 화제가 되고 그의 마음을 달래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자연인이었다. 도시에 살 때도 시골에 들어가 살 때도 그는 자신을 세상에 던지지 않고 홀연히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풀벌레 소리도 풀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까지도 심상의 울림이었다. 작은 원두막을 손수 지어 자신을 자연에 머물게 하려는 노력 같은 것도 어쩌면 그림 속 가족과 홀로 있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이었을 것이다.
칼라보다는 먹과 흰색을 대부분 사용하여 그린 작품에서 보이듯이 그는 멋을 잃지 않으려 했다. 작은 화면 속에서도 흰 여백은 언제나 살아있다. 작은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이 아니라 작은 화면에 더 작은 그림이 들어가고 여백은 그만큼 남겨 놓음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다.
그의 산문집에서 '화가는 오로지 그림으로 표현될 뿐이다.'라고 말했듯이 그는 그림을 위해 화실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고뇌하고 생각하며 쌓아 놓은 압축된 심상을 작품으로 표출해 내었다고 했다. 삶은 영원한 것이 없듯이 그는 삶과 죽음에 초연했고 그러했기에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세상과 결탁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를 지켜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다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독보적 존재다.
그의 작품 세계가 탄생 백 년을 맞아 재조명되었듯이 앞으로도 그의 사상과 작품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의지대로 전승되기를 기대해본다. 그의 삶 자체가 후배 화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그리고 그런 사상에 흠취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어 나가는 인물들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